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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안개 속의 풍경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며칠 째 창밖이 부옇다. 아침에 눈 뜨면 미세먼지 수치부터 확인하는 이런 일상은 몇 해 전까지도 상상하지 못했다. 한낮에도 세상이 밝아지지 못하게 될까 두려운 기분이다. 이런 풍경이 두 시간 이상 계속되던 영화가 있었다.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 1988년에 베니스 영화제 수상으로 세상의 주목의 받았던, 길고 지루한 롱테이크에 삶의 온갖 은유를 담아낸 ‘예술영화’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영화의 기준 중 하나는 볼 때 졸았지만 다음날 아침 세수할 때 문득 떠오르고 그 의미가 새삼 궁금해지는 그런 영화인데, ‘안개 속의 풍경’이 그랬다.  
 
열두 살 볼라와 다섯 살 알렉산더는 독일에 있다는 아버지가 그리워 가출을 했다. 기차에 무임승차해 경찰에 넘겨지지만 도망쳐 나와 계속 독일로 향한다. 도중에 만난 어른들로부터 아버지가 독일에 있다는 게 거짓이란 말을 듣게 되지만 남매의 여정은 중단되지 않는다. 세상의 온갖 폭력에 상처를 입지만 계속 나아가는 남매의 모습이 자욱한 그리스의 들판과 척박한 시골 풍경과 함께 이어지는데, 그 중에서도 내겐 제일 잊히지 않는 한 장면이 있다.  
 
어느날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소년이 시골마을 식당에 무작정 들어갔는데, 식당주인이 음식 값만큼 일을 시킨다. 우리 나이로도 여섯 살밖에 안된 소년이 홀을 쓸고 닦는다. 그런데 행색이 허름한 한 남자가 들어와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한다. 그 역시 한 끼 값도 없는 떠돌이 악사였다. 순간 소년은 일손을 멈추고 방금 전까지 자신이 치우던 의자에 앉아 그의 연주를 감상한다. 홀에는 악사와 그 뿐이지만 소년은 제법 의젓한 자세로 진지하게, 마치 예술가의 창작 행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란 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그리고 연주가 끝나자 아이는 정중한 박수를 보낸다.  
 
삶의 향기 11/17

삶의 향기 11/17

예술이 뭔지, 우리 삶에서 예술의 자리가 어디인지 생각할 때면 그 장면이 떠오른다. 큰 극장에서 유명 연주자의 음악에 ‘부라보’와 ‘앵콜’을 외칠 때보다, 영화 속 그 장면이 내겐 오히려 예술의 본 모습에 더 가까운 풍경이었다. 인간은 비어있는 공간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시간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던데. 안개 속을 걷듯 암담한 처지인 악사와 소년이 누구보다 진지하게 그 연주하고 감상한 그런 순간이 어쩌면 더 예술적인 시간일 수도 있지 않을까.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예술에 대한 담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요즘, 예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으로선 더욱 혼란스럽다. 교육부로부터는 산업현장의 수요에 맞춘 커리큘럼을 보다 적극적으로 개발하라는 요구를 강하게 받고 있다. 예술 창작 교과목도 산업체와 긴밀히 소통한 주문생산 형태의 커리큘럼으로 운영해야 대학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 콘텐트는 무엇보다 당대의 공통감각과 문제의식을 공유해야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작가다운 독창적 관점으로 문제를 새롭게 제시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러니 창작 교육에서 제일 중요한 건 미래 주역들의 자율성과 독창성을 길러주는 것 아닐까.
 
‘안개 속의 풍경’의 남매는 무척이나 암담한 길을 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행을 하고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소년 알렉산더는 어디 있는지도 모를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아빠, 우리는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여행하고 있어요. 정말 이상한 세상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행복해요, 우리는 여행하고 있으니까요.”
 
지금 우리도 많은 불확실성 속에 놓여있지만 희망의 빛을 찾아 더 나은 길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 쉽게 포기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지켜야 하는 것들은 지켜가야 한다. 영화 속 그 소년이 악사의 연주를 존중하며 지켰던 그 짧지만 충만했던 예술적 시간처럼 말이다.
 
고선희 방송작가·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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