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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만추 - 바라봄

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이건용 작곡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낙엽이 진다. 찬비가 하루 내리더니 나무를 물들였던 단풍이 떨어져 땅을 덮는다. 은행나무 밑은 노랗게, 느티나무 밑은 밝은 갈색으로, 벚나무와 단풍나무 밑은 붉게. 땅 위의 낙엽이 수북해지니 나무는 더 투명하다. 햇빛 밝은 오후, 정원의 벤치에 앉는다. 위아래로 보이는 색의 잔치가 그대로 시(詩)다. 스마트폰에 친구들이 자기 주변에서 만나는 만추의 정경들을 올린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단톡방에는 시심이 한창이다. “가을이구나! 빌어먹을 가을/ 우리의 정신을 고문하는/ 우리를 무한 쓸쓸함으로 고문하는/ 가을! 원수같은// 나는 이를 깨물며/ 정신을 깨물며, 감각을 깨물며/ 너에게 살의를 느낀다/ 가을이여, 원수같은”(정현종 ‘가을, 원수같은’). 한 사람이 올리자 다른 사람이 화답한다. “…이제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게 되는 시간/ 기다리라 더욱/ 오래 오래 그리고 많이”(나태주 ‘다시 9월’). 그냥 읽기만 미안해서 나도 참여한다. 가을이면 읊조리게 되는 두보의 등고(登高). “…가없이 지는 나뭇잎은 소소히 나리고/ 다함 없는 긴 가람은 이어 이어 오놋다. …”
 
시인의 마음을 빌어 가을을 느끼고 낙엽을 본다. “왜 스스로의 말을 찾지 않고 세상에 나온 레디메이드 시심으로 대신 하는가?” 잠시 반성을 하지만 해 보기도 전에 아는 시와 노래가 먼저 떠오르는 것이 사실이다. 어린 시절 아직 삶의 어려움을 모른 채 나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좋아했다. 삶을 알아서 그 음악을 이해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음악을 통해서 삶의 그늘을 알게 되었다.
 
신문에 낙엽으로 하트모양을 만들어 놓은 사진이 실렸다. 얼마 전 산사에 가서도 비슷한 것을 보았다. 낙엽을 모아 하트모양을 만들어 놓고 그 가운데 의자에 앉아 사진들을 찍고 있었다. 무심한 시심보다는 분명한 뜻이 더 좋은가 보다. 하긴 음악이 무엇을 표현하는지 모호하면 사람들이 어려워해서 출판업자들은 작곡자가 붙이지 않은 제목을 곡에 붙이곤 했다. 하이든의 현악 4중주 ‘종달새’, 교향곡 ‘시계’가 그렇고 베토벤의 ‘월광’도 작곡자와는 무관하게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은 그 제목을 통해서 곡을 이해한다.
 
은행나무는 유난히 색의 변화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잎이 날 때도 연두색의 파스텔 톤에서부터 싱싱한 녹색으로 차근차근 변하고 단풍도 한 달 넘어 긴 시간 동안 조금씩 그 색이 변하다가 샛노랗게 된다. 늘 지나다니는 은행나무 길은 계절의 변화를 색으로 보여주는 그림 달력이다. 이 나무를 두고 사람들은 냄새가 고약해서 가로수로 부적합하다고 불평을 한다. 나도 그랬는데 독일 친구들이 “와, 고급 치즈 냄새네. 좋다!” 했다는 얘기를 아들에게 듣고는 이제 무심해졌다. 마음을 바꾸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더니 그런 셈이다.
 
나는 한때 아카시 나무를 미워했다. 일본인들이 심은 이 나무가 다른 나무들을 못살게 해서 우리 강산의 숲을 해친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꽤 오랫동안 지속된 나의 이 오버한 애국심은 이 나무의 역사, 생장방식, 유용성, 특히 꿀과 관련한 탁월한 생산성에 대한 설명을 듣고 해소되었다. 지금은 봄이 흐드러질 때쯤 아파트 단지와 거리에 짙게 퍼지는 이 꽃향기를 못내 기다린다. 꿀의 값이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봄의 한 주간 시민들에게 선사하는 이 향기의 값은 그 몇 곱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보고 있는 동안 사람이 나와 정원의 낙엽을 빗자루로 쓴다. 잎을 다 쓸어 모았는데 다시 마당에 잎이 떨어지자 그는 아예 나무를 흔들어 남았던 잎들을 다 떨어버린다. 아쉬워하며 정원을 떠나는데 ‘누른 포도잎’이 생각난다. “…오늘도 나는 비 들고/ 누른 잎을 울며 쓰나니/ 언제나 이 비극 끝이 나려나/ 검젖은 뜰 위에 하나 둘/ 말없이 내리는 누른 포도잎”(오일도). 역시 우리는 시인의 눈을 통해 가을과 세상을 느끼고 보나 보다.
 
이건용 작곡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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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