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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 종전 100년, 파리서 왕따 당한 ‘아메리카 퍼스트’

1차 세계대전 기념식장을 향해 파리 샹젤리제 거리를 각국 정상들이 걷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EPA=연합뉴스]

1차 세계대전 기념식장을 향해 파리 샹젤리제 거리를 각국 정상들이 걷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EPA=연합뉴스]

 지난 11일(현지시간) 오전 11시쯤 비가 내린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거리.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각국 정상 수십명이 검은 우산을 쓰고 기념식이 열리는 개선문을 향해 걸었다. 
 
스산한 날씨에 나란히 어깨를 붙인 정상들이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1918년 11월 전쟁이 그친 순간을 기념하는 종이 울렸다.
  
 하지만 이 자리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정상들이 엘리제 궁에서 행사장까지 버스로 함께 이동한 것과 달리 트럼프 대통령은 멜라니아 여사와 별도 차량을 이용했다. 
 
교통이 통제된 샹젤리제 거리를 트럼프 대통령이 탄 차가 지나가자 상반신을 노출한 여성 시위자가 삼엄한 경비를 뚫고 뛰쳐나왔다. 그는 트럼프를 향해 “가짜 평화주의자"라고 외쳤다.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 근교의 쉬렌 군사묘지를 찾았다. 1차 대전에서 희생된 미군 장병 1500여 명의 유해가 묻힌 곳이다. [A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 근교의 쉬렌 군사묘지를 찾았다. 1차 대전에서 희생된 미군 장병 1500여 명의 유해가 묻힌 곳이다. [AP=연합뉴스]

 
 1차 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식이 열린 파리에서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firstㆍ우선주의)’는 대부분 ‘아메리카 얼론(aloneㆍ나 홀로)’을 의미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다른 정상들과 행보를 같이 하지 않고 뒤늦게 기념식장에 나타난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이 이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꼽혔다. 트럼프처럼 혼자 이동해 지각 등장한 정상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뿐이었다.
 
 이번 행사에선 일방주의 외교 정책을 고수하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마크롱 대통령은 기념식 연설에서 “배타적 민족주의는 애국심의 정반대이자 애국심에 대한 배신"이라며 “국가들이 자신의 이해를 앞세우는 것은 가장 중요한 도덕적 가치를 져버리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낡은 망령들이 혼돈과 죽음의 씨앗을 뿌리려고 되살아나고 있다"고도 꼬집었다.
파리평화포럼에 나란히 참석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EPA=연합뉴스]

파리평화포럼에 나란히 참석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EPA=연합뉴스]

  
 지난달 텍사스주 중간선거 유세에서 “난 민족주의자"라고 선언한 트럼프 면전에서 직격탄을 날린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솔직히 세계주의자는 세계가 잘 되길 바라는 사람이지, 자기 국가에 대해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트럼프에 대한 비판은 마크롱 대통령이 60개국 이상 정상을 초청해 마련한 파리평화포럼에서도 터져나왔다. 메르켈 총리는 포럼 연설에서 “1차 대전은 고립주의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보여준다. 편협한 국가주의자들의 관점이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EPA=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EPA=연합뉴스]

 하지만 정작 도마 위에 오른 당사자인 트럼프 대통령은 포럼에 불참했다. 오전 개선문에서 열린 기념식이 끝나자마자 주프랑스 미 대사관저로 이동했다. 그가 파리 방문 동안 다른 정상들과 떨어져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AP는 전했다.
 
 미국 우선주의 깃발을 든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연합(EU)에 관세를 부과하고, 파리기후 협약과 이란 핵 합의에서 탈퇴했다. 유럽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들에 방위비 지출을 크게 늘리지 않으면 미국이 탈퇴할 수 있다고도 압박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지난 6일 미국에 의존하기 어려운 만큼 유럽 독자군을 창설하자고 제안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매우 모욕적"이라는 ‘작심 트윗'을 올렸다. 
 
이를 고려해 친근감을 표한 마크롱과의 정상회담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시종일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백악관 정상회담 등에서 얼굴을 맞대는 비주 인사까지 나누며 브로맨스를 선보였던 마크롱 대통령이 친근감의 표시로 트럼프 대통령의 허벅지를 쓰다듬었을 때도 무시한 채 화답하지 않았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보도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오른쪽)이 정상회담 도중 다리를 만지며 친근감을 표했지만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 [AP=연합뉴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오른쪽)이 정상회담 도중 다리를 만지며 친근감을 표했지만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 [AP=연합뉴스]

 ‘평화는 글로벌 거버넌스와 연결돼 있다'는 글귀를 내건 평화포럼에서 다른 정상들이 협력 방안을 논의할 무렵에도 트럼프는 '외톨이 행보'를 했다. 그는 혼자 파리 근교의 쉬렌 군사묘지를 찾았다. 1차 대전에서 희생된 미군 장병 1500여 명의 유해가 묻힌 곳이다. 
 
 당초 트럼프는 전날 ‘해병대의 전설'로 불린 벨로 숲 전투 참전 미군 장병들이 묻힌 엔 마른 묘지를 참배하려다 악천후로 취소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마크롱 대통령, 메르켈 총리 등이 비가 내리는 가운데 파리 외곽 여러 곳에서 전사자 추모 일정에 참여한 것과 달랐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을 담당했던 데이비드 프럼은 “중요한 기념일에 참석하려고 프랑스까지 와놓고 목숨을 바친 미국 장병들에게 경의를 표하기보다 방에서 TV나 보고 있다는 건 믿기 힘들다"고 꼬집었다.
 
트럼프의 ‘마이 웨이’가 이어지는 동안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평화포럼 연설에서 “오늘날 몇몇 요소를 보면 1930년대와 유사한 점이 많다”며 “예측할 수 없는 일련의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호무역 기조와 이민 배척 등 트럼프가 주도하는 포퓰리즘의 확산이 2차 세계대전 이전 상황을 상기시킨다고 지적한 것으로 외신들은 풀이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우며 인사하고 있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 [A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에게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우며 인사하고 있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 [AP=연합뉴스]

  
이번 파리 행사는 트럼프의 국가주의와 마크롱이 주도하는 세계주의가 전쟁을 치르고 있음을 보여줬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진단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ng.co.kr
국가주의 물려받은 트럼프, 세계주의 물려받은 마크롱
마크롱 대통령은 100년 전 비밀외교 폐지 등 14개 항의 평화원칙을 발표하고 이를 근간으로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서 국제연맹 창설을 주창한 우드로 윌슨 전 미국 대통령을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 출신인 윌슨의 주장은 미국 내에서 암초를 만났다.
 
상원이 미국의 국제연맹 회원 가입을 승인해주지 않은 것이다. 반대 움직임은 핸리 캐봇 롯지 상원의원이 주도했다. 그는 “세계주의는 일종의 반발로 비치는데, 나는 미국을 우선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100년이 흐른 후 아메리카 퍼스트를 강력하게 주창하는 민족주의자를 대통령으로 갖게 됐다. ‘트럼피즘'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는 유럽에서 세를 확장하고 있다. 이탈리아, 헝가리, 네덜란드, 독일 등에서 극우나 포퓰리즘 정당이 약진 중이다.  
 
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국제연맹을 무시하면서 무정부 상태가 초래됐지만, 국제연맹 역시 2차 세계대전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한 허점을 노출했다고 FT는 지적했다. 국가주의로 내달리는 트럼프와 세계주의의 총대를 맨 마크롱의 경쟁의 결과는 인류의 미래 역사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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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