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채인택 기자 사진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 구독신청

미숙한 평화조약이 더 큰 전쟁을 불렀다…100주년 맞은 1차대전 종전의 반전 교훈

딱 100년 전인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에 끝난 제1차 세계대전은 규모가 하도 크고 희생이 많았기에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는 거창한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이 전쟁의 종결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새로운 비극을 불렀다는 데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 1차대전을 마무리하는 정전협정과 평화조약의 과정이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미숙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을 맞는 11월 11일을 앞둔 지난 6일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추모의 뜰'에 전몰자를 기리는 포피 조화가 줄줄이 꽂혀 있다. 개양귀비꽃인 포피는 1차대전 당시 서부전선의 주전장인 플랑드르 전선의 들판에 많이 피었던 꽃으로 추모의 상징이 됐다. 영국과 영연방 국민의 상당수는 종전기념일을 전후해 가슴에 포피 조화를 달고 다닌다. 전쟁 당시 젊은 세대의 40%가 숨진 참극을 기억하자는 의미다. [EPA=연합뉴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을 맞는 11월 11일을 앞둔 지난 6일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추모의 뜰'에 전몰자를 기리는 포피 조화가 줄줄이 꽂혀 있다. 개양귀비꽃인 포피는 1차대전 당시 서부전선의 주전장인 플랑드르 전선의 들판에 많이 피었던 꽃으로 추모의 상징이 됐다. 영국과 영연방 국민의 상당수는 종전기념일을 전후해 가슴에 포피 조화를 달고 다닌다. 전쟁 당시 젊은 세대의 40%가 숨진 참극을 기억하자는 의미다. [EPA=연합뉴스]

 
내부에서 무너진 독일, 항복이 유일한 선택
독일은 1918년 11월 11일 사실상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했다. 11월 8일 바이에른에서 공화국 선포가 이뤄졌으며 9일엔 빌헬름 2세 황제가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독일제국은 무너졌고 독일은 더는 전쟁을 지속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동부 전선에선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가 광활한 영토를 내놓고 전쟁에서 이탈했으며 서부전선에선 독일 영토가 아닌 프랑스와 벨기에 땅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종전 뒤 독일에선 ‘뒤에서 찌른 비수’, 즉 국내의 전쟁 반대 세력이 다 이긴 전쟁을 망쳤다는 억측도 있었다. 이처럼 군사적으론 독일에 그리 불리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국내 사정은 항복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1918년 11월 11일 새벽 5시 연합군 사령부가 있던 프랑스 콩피에뉴의 숲에 있던 페르디낭 포슈 사령관의 전용 기차에서 진행된 정전 서명 사진에 색을 입힌 모습.정전 시기는 11시로 잡았다. [위키피디아]

1918년 11월 11일 새벽 5시 연합군 사령부가 있던 프랑스 콩피에뉴의 숲에 있던 페르디낭 포슈 사령관의 전용 기차에서 진행된 정전 서명 사진에 색을 입힌 모습.정전 시기는 11시로 잡았다. [위키피디아]

 
11월 11일 11시 기억의 날로
교전 중지 시점은 영국이 제안했다. 사실 독일은 이미 11월 11일 오전 5시 연합군 총사령관인 프랑스군 페르디낭 포슈(1851~1929년) 원수 앞에서 정전 문서에 서명했다. 장소는 프랑스 파리에서 60㎞ 떨어지고 전선에서 멀지 않은 콩피에뉴의 숲에 포슈 원수의 전용 기차 안이었다. 교전 중지 시간은 ‘즉각’이 아니고 6시간 뒤인 오전 11시였다. 영국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영국인들은 ‘11번째 달, 11번째 날, 11번째 시간’이라고 표현하는 이 시점은 11이 세 차례나 겹쳐 한번 보면 잊기가 쉽지 않다. 전쟁의 참극도 함께 기억해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의도가 엿보인다.  
1940년 6월 콩피에뉴 숲의 포슈 원수 전용기차 앞에서 진행된 프랑스의 항복 서명 장면.[위키피디아]

1940년 6월 콩피에뉴 숲의 포슈 원수 전용기차 앞에서 진행된 프랑스의 항복 서명 장면.[위키피디아]

 
승전국 프랑스, 독일에 대한 보복 기도  
문제는 그다음이다. 전투는 중지됐지만, 전쟁을 외교적으로 완전히 끝내려면 강화회담을 거쳐 평화조약을 맺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승전국 프랑스가 보복을 원했다는 사실이다. 보복의 핵심은 ‘모욕’이었다. 특히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독일의 프로이센에 패전한 치욕을 갚고 싶어 했다. 프랑스의 ‘독일 때리기’ 의도는 종전 과정을 위해 이후 열린 중요한 날짜와 장소의 선택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군이 무조건 정전에 서명한 프랑스 콩피에뉴의 포슈 원수 전용 기차 앞에서 포슈(오른쪽에서 둘째)와 일행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18년 11월 11일 독일군이 무조건 정전에 서명한 프랑스 콩피에뉴의 포슈 원수 전용 기차 앞에서 포슈(오른쪽에서 둘째)와 일행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40년 전 패전일 맞춰 강화회담 시작  
전쟁을 정치적, 외교적으로 완전히 종결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파리 강화회담(베르사유 평화회담이라고도 함)은 1919년 1월 18일 열렸다. 택일이 묘하다. 이날은 프랑스에 국치일이나 다름없다. 1870~1871년 벌어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도중 파리를 포위한 프로이센군이 이날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독일 통일을 선언하고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시가 독일 황제에 오른 날이다. 프랑스인에겐 악몽이다.  
이 전쟁은 새로 탄생한 독일 제국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년) 총리와 프랑스 임시정부의 쥘 파브르(1809~1880년) 외상이 그해 1월 2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베르사유 정전협정’을 맺으면서 비로소 끝났다. 외교적 해결은 1871년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맺으면서 이뤄졌다. 프랑스는 통일 독일의 빌헬름 1세를 황제로 인정하고, 동부 알자스-로렌을 독일에 넘겨야 했다. 프랑스인에겐 잊지 못할 치욕이다.  
 
1940년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 독일은 1차대전 전전협정을 서명했던 포슈 전용 기차를 서명 장소인 콩피에뉴로 가져와 6월 22일 프랑스의 항복을 받았다. 바로 그 기차 앞에서 환담을 나누는 아돌프 히틀러(오른쪽에서 둘째)와 그 일행. [위키피디아]

1940년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 독일은 1차대전 전전협정을 서명했던 포슈 전용 기차를 서명 장소인 콩피에뉴로 가져와 6월 22일 프랑스의 항복을 받았다. 바로 그 기차 앞에서 환담을 나누는 아돌프 히틀러(오른쪽에서 둘째)와 그 일행. [위키피디아]

독일 통일 선포지에서 1차대전 강화조약  
묘한 날짜에 시작한 파리 강화회담은 ‘베르사유 강화조약’ 체결로 이어지면서 1차대전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조약 장소와 날짜 역시 묘하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거울의 방’에서 서명이 이뤄진 것은 누가 봐도 프랑스의 ‘역사 뒤집기’다. 1871년 독일 통일과 독일 제국 건국, 그리고 프로이센 국왕인 빌헬름 1세의 황제 등극이 이뤄진 바로 그 장소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장소에서 프랑스는 1차대전 패전국인 독일에 엄청난 징벌과 모욕을 가했다. 6월 28일은 1차대전의 원인을 제공했던 오스트리아 황위 계승권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된 바로 그날이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0개의 나라로 찢어지면서 공중 분해됐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각각 중부 유럽의 작은 나라가 됐다. 프랑스는 모욕을 모욕으로 갚았다.  
1871년 1월 18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열린 독일 통일 선포힉과 빌헬름 1세의 황제 취임을 다룬 안톤 폰 베르너의 회화 작품. [위키피디아]

1871년 1월 18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열린 독일 통일 선포힉과 빌헬름 1세의 황제 취임을 다룬 안톤 폰 베르너의 회화 작품. [위키피디아]

 
모욕을 모욕으로 갚은 보복성 평화조약
이처럼 베르사유 강화조약은 항구적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독일 혼내주기’ 독일 모욕주기‘로 일관했다. 복수심으로 똘똘 뭉친 프랑스가 감정에 치우쳐 독일에 가혹한 징벌을 가하는 바람에 2차대전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결과적으로 전쟁을 종결하려다 오히려 더 크고 잔혹한 새로운 전쟁을 부른 ’실패한 평화조약‘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1919년 6월 전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의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 모습.[중앙포토]

1919년 6월 전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의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 모습.[중앙포토]

모욕감 받은 독일인, 경제적 고통까지
그 내용을 상세하게 살펴보자. 베르사유 강화조약의 결과 독일은 1871년 가져갔던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돌려준 것은 물론 1320억 마르크라는 천문학적인 징벌적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독일 전체 영토의 15%가 프랑스, 벨기에, 덴마크, 그리고 신생국 폴란드에 넘어갔다. 독일의 모든 식민지도 승전국들이 나눠 가졌다.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와 접한 독일 서부의 라인란트에는 독일이 군대도 주둔할 수 없었다. 독일군은 병력이 10만 명 이하로 제한됐고 전함이나 항공기 등 주요 무기의 보유가 금지됐다. 전쟁에서 진 독일인은 이 조약으로 심한 모욕을 느꼈을 뿐 아니라 엄청난 인플레 등 경제적 고통까지 당했다.  
 
1923년 독일이 1차대전 배상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다고 독일의 탄광 지대이자 공업 지역인 루르 지방을 점령한 프랑스군(오른쪽)이 주민과 대화하고 있다. [중앙포토]

1923년 독일이 1차대전 배상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다고 독일의 탄광 지대이자 공업 지역인 루르 지방을 점령한 프랑스군(오른쪽)이 주민과 대화하고 있다. [중앙포토]

프랑스는 독일 재건 가능성 우려
프랑스는 한술 더 떠 베르사유 조약이 약하다고 불만을 가졌다. 독일을 더욱 눌러 전쟁이 더는 불가능하게 해야 했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독일의 주요 공업지대이자 석탄 주생산지인 라인 강 서안 지역을 아예 자국에 합병하고 싶어 했다. 독일 최대 공업지대를 합병함으로써 1차대전으로 인한 프랑스의 손실을 보상하고, 독일이 다시는 강한 나라로 재건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프랑스가 대륙의 패권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영국 등 다른 나라의 우려와 견제로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를 그린 아일랜드 화가 윌리엄 오르펜의 작품. [영국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를 그린 아일랜드 화가 윌리엄 오르펜의 작품. [영국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독일 공업지대 점령해 배상금 현물로  
프랑스는 1923년엔 독일이 배상금을 제때 갚지 않는다고 벨기에와 함께 독일 서부 공업지대인 루르 지방을 점령하기까지 했다. 배상금을 대신한다며 그 지방에서 많이 나는 석탄을 다량으로 가져갔다. 베르사유 조약은 프랑스인도 불만이 많았지만, 독일인은 거의 모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베르사유 조약은 훗날 화근이 됐다. 평화를 보장하기는커녕 제2차 세계대전을 부른 주요 요인이 됐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 현장의 모습. [중앙포토]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 현장의 모습. [중앙포토]

 
히틀러 야욕에도 손쓰지 못한 국제사회  
모욕은 새로운 모욕을 낳았다. 1933년 총선에서 승리해 독일 총리가 된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대놓고 베르사유 조약을 어겼다. 뒤늦게 연합국도 문제를 인식해 배상금 규모를 줄여줬지만, 히틀러는 아예 배상금 지급을 중단했다. 베르사유 조약이 제한한 군 병력을 대폭 늘린 것은 물론 보유가 금지됐던 군함과 비행기 등 무기도 다량 확보했다. 과거 베르사유 조약에서 모욕감을 느꼈던 독일인은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히틀러의 재무장을 지지했다. 다시 힘을 얻은 독일 앞에 연합군은 아무런 손도 쓸 수 없었다. 히틀러가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와 접경한 라인란트에 군대를 다시 보내 재무장을 시켜도 프랑스를 비롯한 연합국은 대응할 수 없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대구경 애포를 폐기하는 독일 노동자들' [위키피디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대구경 애포를 폐기하는 독일 노동자들' [위키피디아]

 
1차대전 종전장소에서 2차대전 프랑스 항복
그 뒤 히틀러는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했다. 1940년 5월  10일에는 프랑스를 침공했다. 총통 요새인 마지노선을 믿고 태평이던 프랑스는 기동력이 좋은 전차를 앞세운 독일군의 전격작전 앞에 패퇴를 거듭했다. 결국 프랑스는 6월 22일 독일에 항복했으며 이는 6월 25일 발효됐다. 전쟁은 짧았지만, 프랑스는 수도 파리를 포함한 국토의 상당 부분을 독일에 점령당하는 참화를 겪어야 했다. 프랑스의 일부 영토는 비시에 기반을 둔 괴뢰 정권이 맡았다.  
프랑스를 군사적으로 무력화한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복수를 시작했다. 독일이 1918년 11월 11일 1차대전 정전문서에 서명했던 콩피에뉴 기차를 찾아내 같은 장소에 가져오게 한 뒤 그곳에서 프랑스의 항복을 받았다.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 원본도 가져갔다. 원본은 그 뒤 찾지 못하고 있다. 모욕을 모욕으로 갚은 프랑스에 대해 다시금 모욕으로 보복을 가한 셈이다. 보복의 악순환이다.  
 
글로벌 줌업 1차대전 종전 100년

글로벌 줌업 1차대전 종전 100년

평화협정, 시기보다 성숙이 중요
결국 제대로 된 평화체제를 고민하지 않고 패전국에 대한 보복과 모욕으로 일관한 베르사유 조약은 2차대전이라는 대참극의 주요 원인을 제공한 셈이다. 물론 어떤 전쟁이든 하루빨리 끝내는 것이 좋다. 이를 정치적, 외교적으로 마무리하는 평화조약도 중요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속한 평화조약 체결이 아니고 그 내용에 있다, 서로 싸웠던 상처가 있는 나라와 그 국민이 미래를 함께 건설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야 한다. 이는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촘촘한 기획과 정교한 장치가 필요하다. 경제적, 외교적, 사회적으로 조약 이행을 보장하기 위한 여건을 충족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그래야만 평화를 담보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조약은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1차대전 종전과 베르사유 조약은 잘 보여준다. 구호나 감정만으로 이룬 평화는 아직 없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을 구독하시면
기사 업데이트 시 메일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다른 기자들의 연재 기사 보기

뉴스레터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