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3대 걸쳐 독립운동… 봉화 '작은 국립묘지' 묻힌 가문은?

기자
송의호 사진 송의호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35)
경북 봉화군 재산면 동면리 바디실 청량산 자락에는 독립유공자 5인이 잠든 묘역이 있다.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펼친 한 가족이 세상을 떠난 뒤 모여 있는 곳이다. 소규모 국립묘지로 지정을 검토할 만하다.


이황 후손인 형과 아우가 과거 1, 2등 차지
경북 봉화군 재산면 청량산 자락에 위치한 유천 이만규의 묘. 주손 이동후 옹이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송의호]

경북 봉화군 재산면 청량산 자락에 위치한 유천 이만규의 묘. 주손 이동후 옹이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송의호]

 
이곳 5위 중 가장 어른은 안동에서 을미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단식으로 순절한 향산 이만도 선생이다. 유림의 독립운동인 파리장서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아우 유천 이만규(1845∼1920) 선생도 있다.
 
형제는 나라가 망하기 전 둘 다 과거에 급제했다. 그것도 향산은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유천은 문과 갑과에 2등을 차지한다. 형제는 벼슬에 나아가 홍문관 등 요직을 거쳤지만 나라가 망하자 독립운동이라는 가시밭길을 스스로 걸어갔다. 향산은 나라 잃은 잘못이 자신에게 있다며 단식 24일 만에 세상을 떠난다. 아우 유천도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도 형을 따라 단식을 하려고 했지만 향산의 만류로 후일 파리장서 운동에 참여한다.
 
의병장을 지낸 향산 이만도와 그 아래에 자리한 아들 이중업 부부의 묘. 모두 독립유공자가 됐다. [사진 송의호]

의병장을 지낸 향산 이만도와 그 아래에 자리한 아들 이중업 부부의 묘. 모두 독립유공자가 됐다. [사진 송의호]

 
향산과 유천은 퇴계 이황의 11대손이다. 거기다 아버지 이휘준은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고 할아버지 이가순 역시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응교를 지낸 3대 문과 급제 가문이다. 이런 집안이 망국이란 시기를 맞아 다시 3대 독립운동 가문으로 거듭난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의무)의 전형이다. 향산은 많이 알려져 있다. 반면 아우는 거의 가려져 있다.
 
유천의 면모도 놀랍다. 1911년 일제는 조선을 강탈한 뒤 벼슬 지낸 관료를 우대한다는 명목으로 일왕의 은사금(恩賜金)을 전하려 했다. 유천은 “나는 대한제국의 신하로 이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글을 썼다. 그러자 일제는 은사금 두 배를 제시하며 협박했다. 
 
향산이 24일 단식 끝에 순국한 안동시 예안면 인계리에는 백범 김구가 글씨를 쓴 유허비가 세워졌다. [사진 송의호]

향산이 24일 단식 끝에 순국한 안동시 예안면 인계리에는 백범 김구가 글씨를 쓴 유허비가 세워졌다. [사진 송의호]

 
유천은 욕됨을 억누르지 못해 마침내 칼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피가 땅에 흥건했다. 일본인들은 깜짝 놀라 겁을 집어먹고 가버렸다. 이때 사용한 칼은 향산이 단식하면서 “언젠가 쓰일 때가 있을 것”이라며 아우에게 건넨 것이었다.
 
1919년 파리 만국평화회의를 앞두고 있을 때다. 김창숙‧이중업 등은 세계에 호소할 청원서 초안을 써서 원로의 의견을 들었다. 이른바 파리장서 사건이다. 김창숙은 의정참찬을 지낸 곽종석에 이어 안동으로 유천을 찾아 수정을 부탁한다. 유천은 승낙하면서 “그러나 자력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남의 나라에 애걸하는 것이 아쉽다”며 안타까워했다. 유천은 곽종석과 함께 청원서의 첫머리에 이름을 올렸다. 장서가 파리에 도착하자 유천은 일본에 체포돼 감옥에 갇혔다.


동방의 백이숙제로 불린 형제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아버지 이휘준이 아들 유천을 위해 직접 써서 편집한 맹자ㆍ논어 ㆍ중용 등 서책. [사진 송의호]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아버지 이휘준이 아들 유천을 위해 직접 써서 편집한 맹자ㆍ논어 ㆍ중용 등 서책. [사진 송의호]

 
유천의 독립운동은 1910년부터 30여년간 안중근‧김좌진 등 애국지사 220여 명의 행적을 채록한 독립지사 송상도의 『기려수필(騎驢隨筆)』에 실려 있다. 거기에 유천은 형 향산과 함께 ‘동방의 백이숙제’로 표현돼 있다. “…공(유천)은 부모에 대한 효성과 임금에 대한 의리를 모두 실천했다. …형제는 백이‧숙제와 나란히 전해진다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형제는 나라가 망할 때 선비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향산의 묘 아래에는 다시 부부 독립유공자인 아들 이중업과 며느리 김락이 있고 그 아래엔 독립유공 손자 이동흠이 묻혀 있다.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yeeho1219@naver.com
 
관련기사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오영환 부소장 : oh.younghwan@joongang.co.kr (02-751-5515)
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