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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인 미디어의 선구자였다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41>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설가에서 ‘멘토’로
도스토옙스키가 편집장으로 활약한 잡지 ‘시민’의 1873년 1월 8일자 표지

도스토옙스키가 편집장으로 활약한 잡지 ‘시민’의 1873년 1월 8일자 표지

1871년 7월 8일, 도스토옙스키 부부는 4년 3개월 동안의 해외 생활을 뒤로 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왔다. 2개의 커다란 여행 가방과 주머니에 든 60루블이 전 재산이었다. 만삭의 몸으로 어렵사리 귀국길에 오른 부인은 8일 뒤 아들 표도르를 순산했다. 부인 명의로 빌린 저렴한 셋집에서 부부는 외상으로 구입한 싸구려 가구와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제 어엿한 4인 가정의 가장이자 대작을 세 편이나 연이어 발표한 거물급 소설가였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그해 9월, 도스토옙스키가 귀국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빚쟁이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었다. 형이 죽고 나서 그가 떠맡은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빚을 다 갚기 위해 미친 듯이 펜대를 휘둘렀고, 부인은 부인대로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부업으로 속기 일을 알아보았고, 직접 남편의 책을 팔아 수익을 남겼다. 빚쟁이들이 다녀간 다음날이면 남편이 간질발작을 일으키곤 했기 때문에 남편 모르게 단독으로 빚쟁이들과 협상하고 담판을 지었다. “우리 가족 모두 안락함이나 풍요로움은 말할 것도 없고, 절박하게 필요한 것들도 포기해야만 했다. 언제나 우리 머리를 무겁게 짓누른 빚 변제에 관한 걱정만 없었더라도 14년간의 우리 부부생활은 더욱 풍성하고 행복했을 것이다.”  
 
『악령』의 집필을 끝낸 도스토옙스키는 한숨 돌린 다음 새 소설에 착수할 계획이었다. 때마침 메시체르스키 공작한테서 자기 소유의 시사 주간지 ‘시민’의 편집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연봉 3000루블에 개별적인 칼럼과 논평의 고료를 합치면 연 5000의 수입은 확보될 터였다. 수입도 수입이지만 창작의 짐에서 잠시 벗어나 “러시아 삶의 맥박”을 체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스스로 발행인이자 편집장이자 기고자 역할을 한 1인 잡지 ‘작가일기’의 1877년 1월호 표지

스스로 발행인이자 편집장이자 기고자 역할을 한 1인 잡지 ‘작가일기’의 1877년 1월호 표지

도스토옙스키는 1873년 1월부터 1874년 4월까지 편집장으로서 총 65권의 ‘시민’ 지를 발간했다. 그는 저널리즘의 생리를 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주간지 편집장 일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일단 잡지의 정치적 성향이 문제였다. 보수적인 메시체르스키 공작은 도스토옙스키의 ‘너무 진보적인’ 시각이 못마땅해서 수시로 지청구를 해댔다. 가끔 도스토옙스키로서는 도저히 읽어줄 수도 없는 괴상한 글을 써서 잡지에 실으라고 종용하기도 했다. 진보적인 독자들과 지인들은 또 도스토옙스키가 펴내는 잡지가 ‘너무 보수적’이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필화사건’이 터진 적도 있었다. 당시 출판법에 의하면 황제가 공식석상에서 한 말을 직접화법으로 인용하려면 반드시 사전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그런 법규가 있다는 것을 몰랐던 도스토옙스키는 황제의 발언이 들어있는 메시체르스키 공작의 글을 그대로 잡지에 실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범법행위를 한 잡지사를 대표해서 25루블의 벌금과 48시간 구류형을 선고받았다.  
 
필진과 기고자들을 응대하는 것 또한 큰 일이었다. “그는 돌려 말하는 법을 몰라 무수한 적을 만들었다.” 자기가 쓴 글은 단 한 글자도 수정하면 안 된다고 믿는 기고자들은 오탈자와 비문을 교정한 경우에도 노발대발했다. 잡지사에 쳐들어오거나 원색적인 욕설로 도배한 편지를 편집장 앞으로 투척했다.  
 
도스토옙스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투지에 불타 동일한 강도로 원색적인 답장을 일일이 써서 보냈다. 적의 숫자는 점점 더 늘어갔다. 우체국 다녀오는 일을 맡아 했던 부인은 그런 답장은 부치지 않고 몰래 빼돌렸다가 남편의 화가 식은 후 돌려주었다.  
 
지속적으로 강도 높게 독자와 직접 소통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둘째 딸 류보피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셋째아들 표도르와 부인 안나. 1880년대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둘째 딸 류보피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셋째아들 표도르와 부인 안나. 1880년대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시민’ 지 편집장 일은 1년 남짓 만에 막을 내렸지만 그 의미는 지대했다. 도스토옙스키는 편집장 일을 하면서 잡지에 ‘작가일기’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했고, 그 밖에도 국내 및 국제 정세와 관련한 논평을 꼬박꼬박 기고했다. 편집장 직에서 사퇴한 뒤에는 자신만의 잡지 창간이라는 오랜 꿈을 실행에 옮겼다. 새 잡지의 제목은 ‘시민’지 칼럼 제목과 동일한 ‘작가일기’였다. 그는 새 월간지의 발행인이자 편집장이자 유일한 기고자였다. 러시아 역사상 유례가 없는  ‘1인 미디어’가 탄생한 것이다.  
 
1875년 말 러시아 주요 일간지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잡지가 곧 나올 것”이라는 광고가 실렸다. 1876년 1월부터 매달 말일 이른 아침, 가판대에는 ‘1인 시사종합월간지’가 등장했다. ‘작가일기’는 만 2년 동안 총 22권이 발행되었다. 1877년도에는 5월과 6월, 7월과 8월호가 합본으로 출간되어 24권이 아닌 22권이었다. 1880년에 잠깐 복간되어 1권이 나왔고 1881년 그가 사망하기 직전에도 1권이 나왔다.  
 
잡지의 파급력은 상당했다. 1876년에는 구독자가 2000이었는데, 2000에서 2500권이 추가로 판매되었다. 다음해 구독자는 3000으로 늘었고 3000권이 추가로 팔렸다. 1880년도 단권은 6000부가 판매되었고 1881년도 단권은 무려 1만 4000권이나 팔려나갔다.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어마어마한 성공이었다.  
 
187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 풍경

187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 풍경

생전에 도스토옙스키와 관련이 있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회고록 혹은 회고담을 남겼다. 인쇄소 직공 알렉산드로프도 그 중 하나다. ‘작가일기’를 인쇄하느라 2년간 대문호를 지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알렉산드로프는 『어느 인쇄공이 회고하는 도스토옙스키』라는 회고록을 썼다.  
 
도스토옙스키는 꼼꼼하게 활자체를 선별했고, ‘매달 말일’이라는 독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부인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잡지 관련 사업은 전적으로 사모님의 몫이었다. 인쇄소, 종이공장, 제본소, 서적상과의 계약과 거래, 유통과 포장과 배송은 모두 사모님이 맡았다.”  
 
알렉산드로프는 수시로 도스토옙스키의 집을 방문해야 했으므로 그의 일과를 상세하게 기억했다. 작가는 오후 2시에 일어나 진한 차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했다. 가벼운 식사, 손님접대, 산책 등 볼일을 보고 저녁 6시경 가족과 식사를 했다. 아이들을 재운 뒤 서재에 들어가 밤새도록 담배를 피우며 원고를 쓰고 새벽녘에 잠자리에 들었다. 알렉산드로프는 존경심과 애정이 절절이 묻어나는 글에서 당시 도스토옙스키는 원고를 잉크가 아니라 “피로 썼다”고 회고했다.  
 
거물 작가와 오피니언 리더 넘어 당대 인플루언서로 급부상
시민지 편집장 시절 살던 슬리브찬스키 건물은 울랴나 그로모바 골목 모퉁이에 있다.

시민지 편집장 시절 살던 슬리브찬스키 건물은 울랴나 그로모바 골목 모퉁이에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당대 독자들의 관심을 끌만한 것은 무엇이건 글감으로 삼아 매호 10편 내외의 칼럼과 에세이를 썼다. 청소년 교육, 유럽과 러시아의 시국, 슬라브 민족의 미래, 유대인 문제, 자살, 알코올 중독, 살인사건의 재판 등 러시아 국내외의 현안을 지면으로 끌어왔다. 깊은 통찰을 보여주는 대목도 많지만 지리멸렬한 대목도 꽤 있다. 편파적인 논조와 걸러지지 않은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날 때도 종종 있다. 저널리즘의 잣대로 평가한다면 ‘작가일기’는 훌륭한 잡지라 보기 어렵다.  
 
‘작가 일기’의 의의는 내용이 아닌 형식에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지속적으로 강도 높게 독자와 ‘직접’ 소통했다. 아니, 독자들로 하여금 이 대단한 작가가 자기네들과 ‘직접 소통한다는 느낌’을 받도록 해주었다. 절제되지 않은 감정은 열정으로 읽혔다. 거친 문장 속에서 독자는 진솔함을 읽었다. ‘작가일기’를 읽다 보면 이상하게도 저자와 직접 이야기하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다. “제 눈앞에는 섬세한 가슴과 호소하는 영혼의 소유자, 시대의 모든 문제에 열렬히 응답하는 인물이 나타났어요. 저는 그분에게 무언가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었어요.” ‘작가 일기’를 시작할 무렵 그는 베스트셀러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였지만, 마무리할 무렵에는 자타공인 러시아 최대의 ‘멘토’로 부상해 있었다.  
 
편지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진로를 비롯한 온갖 인생사의 조언을 구하는 편지가 전국에서 날아들었다. 직접 그의 집을 찾아오는 독자들도 있었다. 그는 구두로, 혹은 편지로 성심껏 ‘상담’에 응했다. 17세 소녀 올가는 상급학교 입시에 실패해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다는 편지를 다섯 통이나 작가에게 보냈다. 작가는 아버지처럼 따뜻한 답장을 써서 소녀를 위로했다. 어떤 청년은 문필가가 되고 싶지만 형편이 어려워 취직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며 하소연을 해왔다. 도스토옙스키는 취업과 글쓰기는 병행 가능하다며 격려해주었다. 청년은 결국 꽤 훌륭한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여성의 교육 등 공적인 성격의 상담을 해 준 경우 내용을 지면에 실어 공론화했다.  
 
그의 문학성을 아끼는 일부 지인들은 “왜 그런 일에 재능을 허비하느냐”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그런 일’이야말로 궁극적으로 그의 문학성의 중요한 일부였다. 귀국 당시 베스트셀러 작가이긴 했지만 도스토옙스키의 명성은 여전히 수도권과 중산층 이상의 독자를 중심으로 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전국 방방곡곡의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플랫폼을 확보했다. 문학 살롱의 여주인 슈탄켄슈나이더 여사는 “러시아 전국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하고 그를 청년층 뿐 아니라 저주받은 문제로 고통당하는 모든 이들의 스승이자 아이돌로 만들어준 것은 ‘작가일기’였다”고 단언했다. 후대 연구자들 역시 도스토옙스키가 전국적인 ‘오피니언 리더’이자 막강한 ‘인플루언서’로 부상한 것은 ‘작가일기’ 덕분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독자께서도 기억하시겠지만 도스토옙스키는 1880년 푸슈킨 동상제막식 연설에서 “예언자”로 불렸다. 그런 어마어마한 호칭은 하루아침에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칼럼을 쓰기 위해 샅샅이 뒤져본 “현실의 모든 디테일”,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나눈 ‘직접적인 소통’이 없었더라면 과연 그가 예언자로 불렸겠는가. 바흐친의 말이 맞다. “이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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