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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공약에만 얽매이지 말고 이젠 시장친화 정책 펴라"

박승 전 한은 총재는 ’ 이념적 원리주의에서 벗어나 과감한 노동개혁과 규제개혁을 통해 기업의 국내 투자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인섭 기자]

박승 전 한은 총재는 ’ 이념적 원리주의에서 벗어나 과감한 노동개혁과 규제개혁을 통해 기업의 국내 투자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인섭 기자]

박승(82) 전 한국은행 총재는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 멘토’로 불린다. 김대중·노무현 정부(2002~2006년)를 거치며 한은 총재를 지냈고, 지난 대통령 선거에선 문재인 후보 캠프 싱크탱크인 ‘국민성장’의 자문위원장을 맡아 J노믹스의 큰 그림을 그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박 전 총재는 경제 사령탑 교체 이후 경제정책의 방향에 대해 “시장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친시장·친기업·친서민적인 실용주의적 정책을 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 경제가 이제 본격적으로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었다”며 “대선 공약이나 단기간의 성과에 얽매이지 말고 과감한 노동개혁과 규제개혁으로 기업 투자를 이끌어내는 것을 경제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지난 8일 기자와 만난 그는 인터뷰 내내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의 흐름을 깨알 같은 통계 수치를 일일이 제시하면서 꼿꼿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9일 오후 경제팀 투톱 교체가 발표된 후엔 전화로 추가 인터뷰했다.
 
경제 사령탑이 교체됐다. 어떻게 보는가.
“정권 초기 원리주의적 접근에만 치우치다 보니 경제가 제대로 안 굴러가고 성과가 남는 게 없었다. 성과를 무시하고 원칙만 따라가기보다 시장의 효율과 개방경제의 질서를 존중하는 데서 경제의 효율이 나온다. 대선 공약에만 너무 얽매이지 말고 경제 흐름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펴야 한다. 경제사령탑 교체는 앞으로 시장의 효율을 따라가는 실용적인 경제정책을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수 주도의 새로운 성장 엔진 필요
 
새 경제팀의 과제는.
“시장의 흐름을 잘 잡아내야 한다. 소득주도 성장 정책의 취지를 살려 나가되 시장 친화적이고 친서민·친기업적인 실용주의적 정책을 추진해야 할 때다. 경제관료는 학자보다 추진력과 조직력이 뛰어나더라. 이 장점을 잘 살려 나갔으면 한다. 경제팀 운용에서 기업인 출신이라도 실물 경제를 잘 아는 인재가 있으면 등용하겠다는 개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하지만 저성장 기조 속에서 누가 맡더라도 단기적 성과를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관성적으로 과거 시절 생각만 하지 말고 달라진 환경에서 장기적인 대책을 고심해야 할 때다.”
 
한국 경제가 위기에 처했다는 아우성이 사방에서 들린다. 무엇이 문제인가.
“지금 한국 경제는 낡은 성장 엔진을 새것으로 교체하는 전환기에 있다. 저성장·고실업·양극화 등 모든 문제는 이 과정에서 오는 진통이다. 이전까지는 수요 측면에서 수출이, 산업 측면에서 제조업이 고도성장을 주도하는 ‘낙수효과’ 성장에 의존해 왔다. 2008년 국제 금융위기를 계기로 이러한 경제성장 구조가 수명을 다했다. 이제 수출 대신 내수가 주도하는 성장으로 바뀌면서 2%대의 장기 저속 성장 시대의 터널에 들어섰다. 우리 국민들도 이제는 저성장 시대가 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잃어버린 10년’ 불황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양질의 2%대 성장, 좋은 저성장 시대로의 연착륙은 앞으로의 경제정책 운용에서 가장 고민해야 할 과제다.”
 
내수 주도 성장은커녕 내수시장이 아직까지도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내수가 살아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계층 간 소득 격차가 점점 커지고, 기업과 가계 소득 간 괴리가 커지는 게 문제다. 재작년 기업의 순이익은 21% 늘었는데 실질 가계소득은 0.4% 감소했다. 기업이 버는 돈을 가계 소득으로 전달되는 선순환의 길이 막혀 버린 ‘뇌졸중’에 걸려 있다. 가계 소비를 억누르면서 내수 시장이 절대 살아날 수 없다. 내수 확대를 위해 양극화 해소와 국내 투자 증대를 함께하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소득 증대와 일자리 창출의 시작은 결국 기업 투자 아닌가. 현 정부 들어 기업들의 기를 너무 죽이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현 정부가 노동계에 끌려가는 모양새를 보이면서 기업인들이 사업하기 힘들어졌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기업들의 국내 투자 확대야말로는 현 정부의 최대 과제다. 이를 위해선 노동개혁과 규제개혁 외엔 방법이 없다. 기업들 역시 정부 탓만 하면서 정부 정책 때문에 투자를 못 한다는 식의 핑계만 대선 안 된다. 200조원에 가까운 돈을 내부에 쌓아놓고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는 것은 국내에서 돈을 벌 수 없기 때문 아닌가. 내수 시장 규모가 작은 데다 임금 상승, 투쟁적 노사관계 등 고비용 구조가 여전해 투자를 가로막고 있다. 그런데도 원격 의료 등 서비스업이나 카풀 서비스와 같은 공유 경제 등의 현안조차도 이익집단의 반대에 부딪혀 막혀 있는 상황이다.”
 
박 전 총재는 규제개혁의 방향에 대해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모든 규제는 일단 모두 푸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며 “(규제개혁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분야에 대해선 국가 차원에서 별도로 보상해 주는 방안을 강구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기업에 투자를 억지로 강요할 순 없지 않은가.
“기업에 대한 감세나 지원으로 투자를 이끌어내기엔 한계가 있다. 과감한 노동개혁·규제개혁으로 기업의 투자를 유도해내야 한다. 남북교류와 같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한다면 저성장을 뚫을 수 있는 국내 투자 확대의 새로운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최저임금 가파른 인상 속도 조절을
 
친노조 성향으로 평가받는 현 정부가 과연 노동개혁을 할 수 있을까.
“(목소리를 높이며)국내 노동자의 90%는 노조도 없고, 열악한 급여와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노조는 이제 조합원의 이익 보호에만 매달리지 말고 전체 노동자, 전체 국민의 이익을 생각해야 한다. 진보정부에서 노동개혁을 추진해야 성공할 수 있고, 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 지금이 바로 국가 경제를 위해 정부와 노동계가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다.”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한다면.
“우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대해야 한다. 기득권 보호로 노동 경직성이 시장을 지배하면 신규 채용이 더욱 어려워진다. 호봉제 대신 직무급제로 바꿔 노동 생산성도 높여야 한다.”
 
현 정부가 내세운 소득주도 성장 정책을 어떻게 보는가. 일자리와 투자가 늘어나야 소득이 늘어나는데 지금 상황은 정반대로 벌어지고 있다.
“가계소득을 늘려서 내수 주도 성장을 뒷받침하고 양극화를 해결한다는 정책 방향은 지지한다. 과거처럼 대기업 위주의 낙수효과 성장모델로 다시 돌아갈 순 없지 않은가. 그러나 ‘나만 옳다’는 식의 이념적 원리주의에만 이끌려선 안 된다. 은산 분리 규제 완화에 ‘대기업은 안 된다’며 무조건 반대하는 식이어선 곤란하지 않나. 경제 현장을 중시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용적인 정책을 펼쳐야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지금까지의 경제 정책을 평가한다면.
“정책 방향은 맞지만 추진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 당면한 저성장·고실업·양극화 현상은 구조적 문제로 장기간 지속적으로 풀어 나가야 할 과제다. 그런데도 단기간에 조급하게 해결하려고 과욕을 보인 게 아닌가 싶다. 최저임금제,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등에서 일부 시행착오가 이어지면서 경제 정책의 실효성이 떨어져 버렸다.”
 
결국 시장과의 교감에 실패한 게 아닌가.
“(잠시 생각하더니) 최저임금제만 하더라도 2년 내에 29%를 올리는 급격한 변화보다는 매년 7~8%씩 꾸준히 올려나가는 방향을 택했어야 했다. 탄력근로제도 현행 3개월보다 긴 6개월~1년 정도로 늘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칙이 아무리 옳더라도 시장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를 항상 고려해야 한다.”
 
부동산 시장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다.
“보유세를 강화하는 조세정책만이 해법이다. 결국 집을 거주하는 곳으로 생각하지 않고 돈을 버는 축재 수단으로 생각하는 국민의식과 사회 관행이 문제 아닌가. 선진국의 경우 보유세가 시가의 1~1.5% 수준인 데 비해 한국은 0.2% 수준에 불과하다. 앞으로 10년간 매년 단계적으로 선진국 수준으로 올려 나가는 대신 평균 3.4%로 세계 최고 수준인 거래세는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과감하게 인하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다면 무슨 조언을 해주고 싶나.
“대통령 취임 직후 청와대에서 몇몇 인사들과 저녁을 같이 하는 자리에서 실사구시 정책을 펴라는 조언을 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론 만난 적 없다. 문 대통령이 지금은 여러 색깔의 정치인들 울타리 속에 있지만, 경제 상황과 그동안의 경제 정책의 실효성 등을 놓고 판단할 때 당연히 실용주의적 정책 방향으로 가야할 것으로 생각한다.”
 
홍병기 선임기자 klaat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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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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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