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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탐사] 성범죄 복불복 판결 막을 새 잣대는 ‘성인지 감수성’

지난 10월 25일 대법원은 성범죄 재판의 물줄기를 바꿀 수도 있는 판결을 내놨다. 2심까지 무죄로 판단된 A씨(38)의 강간 혐의에 대한 재판을 파기하면서 ‘성인지 감수성’을 증거 평가의 잣대로 제시한 것이다.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판결문에 “법원이 성폭행이나 성희롱 사건을 심리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썼다. 대법원은 ‘성인지 감수성’과 관련해 “(피해자 진술이 믿을 만한지 따질 때)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의 문화와 인식, 구조 등으로 인해 성폭행이나 성희롱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정적 여론이나 불이익한 처우 및 신분 노출의 피해를 입기도 하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 사건에는 피해자가 저항 없이 가해자와 함께 모텔로 향했다는 점, 피해자가 사건 이후에도 가해자와 연락을 취했다는 점 등 통상 법관들이 ‘피해자답지 못한 행위’라고 치부해 온 요소가 많았음에도 대법원은 “피해자 진술을 믿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급심이 무죄 판단의 근거로 삼은 사실들을 피해자의 입장에서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 화두로 떠오른 ‘성인지 감수성’=상반기를 달군 미투 열풍은 소강 국면이지만 ‘성인지 감수성’은 이제 막 사법부의 화두로 떠올랐다. ‘10·25 판결’의 여파다. 그동안 법원은 여성계의 지적에도 ‘성인지 감수성’을 심리의 기준이나 원칙으로 수용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서울중앙지법 성범죄전담재판부의 한 판사는 “그전에는 아예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식이 생기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10·25 판결’의 영향에 대한 전망은 법조계 안에서도 갈리고 있다. 정현미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그동안 법원은 성범죄의 특수성에 대한 고려 없이 일반 범죄에 적용되는 형식 논리에 따라 증거조사와 증인신문을 해 왔다”며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대법원 판결이 나온 만큼 하급심도 점진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CCTV나 목격자는커녕 범행 전후의 정황이나 피고인의 특성을 파악할 자료가 전무한 상태에서 기소되는 사건이 태반”이라며 “수사가 바뀌지 않으면 판사가 진술 내용과 태도가 피해자다운지 따지는 게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성범죄자 96% 남성, 판사 25%만 여성=성범죄자의 96% 이상이 남성(2017년 경찰청 범죄통계)이지만 대법원이 백혜련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전국 법원 성범죄전담부에 배치된 판사 334명 중 여성은 84명(약 25.2%)뿐이다. 전국 고등법원엔 2명뿐이고 부장판사는 1명도 없다.
 
성범죄전담부의 여성 법관 비중이 재판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판단은 엇갈린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남성 부장판사는 “판사의 성별은 재판 결과에 영향이 없다”고 말했다. 반면 안경옥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생물학적 여성이라고 무조건 성인지 감수성이 뛰어난 건 아니지만 직·간접 경험이 있는 여성 법관이 피해자의 상황을 헤아리기 쉽다”며 “여성 법관 비중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수도권 법원의 한 여성 부장판사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인지 감수성은 성장기에 교육을 통해 길러지는 것”이라며 “법관들이 부족한 성인지 감수성을 어떻게 키울지 난감한 문제”라고 말했다.  
 
김성천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성인지 감수성을 끌어올리는 게 어렵다면 현재 아동 대상 사건에만 쓰이는 심리학적 판단 도구를 진술 신빙성 판단에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탐사보도팀=임장혁·박민제·이유정 기자
김나윤 인턴(성신여대 화학4)
deep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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