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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탐사] 성범죄 추행과 무고 사이 … 무죄 72% “피해자 진술 못 믿어”

이모부 A씨에게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B씨는 5년 뒤 고소를 결심했다. A씨는 친족 강간 혐의로 기소됐지만 시간이 많이 흘러 B씨의 기억이 정확하지 못했다. 차 안에서 범행이 이뤄져 증거도 딱히 없었다. 1심 재판부는 “B씨의 진술만 가지고 A씨를 단죄하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면서 “B씨가 상황에 대한 묘사를 번복했고 시간이 오래 흐른 뒤 고소를 한 배경도 의심된다”는 이유를 달았다. B씨의 결혼 및 출산 이력까지 적시됐다.

 
사건은 항소심에서 반전을 맞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 재판부가 너무 쉽게 피해자의 진술을 배척했다”며 A씨에게 징역 3년6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정신적인 충격으로 기억이 일부 흐려질 수 있는 데 반해 핵심적인 부분에 대한 진술이 일관된다”며 “친족인 가해자를 곧바로 신고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피해자의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 재판에선 판사가 핵심적 직접 증거인 피해자 진술을 믿느냐 마느냐에 유·무죄가 달린 경우가 많다. 중앙SUNDAY는 법원판결검색시스템으로 확인이 가능한 서울 지역 1심(법원 서울중앙·동부·남부·북부·서부지법)의 최근 1년(2017년 10월 29일~2018년 10월 29일)치 성범죄 무죄 판례 68건을 입수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법관의 관점과 기준을 분석했다. 혐의는 강제추행·강간(준·유사 사건 포함)으로 한정했다. 이 중 49건(72.1%)이 “피해자 진술을 믿기 어렵다”는 게 무죄 판결의 핵심 이유였다. 44건(64.7%)이 여타의 물증이나 목격 진술 없이 기소된 사건이었고, 폐쇄회로TV(CCTV)나 유전자(DNA) 자료 등 객관적인 증거가 있었던 사건은 7건(10.3%)에 불과했다. 목격자 진술이 뒷받침됐음에도 무죄였던 사건은 17건(25.0%) 있었다.
 
피해자의 진술이 유일한 증거였던 44건 중 29건(65.9%)에서 판사들은 ‘피해자의 전후 행동’을 문제삼았다. ‘피해자답게 행동했느냐’가 문제가 된 것이다. 피해자가 남긴 문자 메시지·카카오톡 메시지가 결정적이었다. 연인 사이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에서 사건 발생 이후 평소대로 하트(♥) 이모티콘을 붙였거나 상대방의 물음에 다정하게 답변한 것, 사건 당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프로필 사진을 변경한 것, 일기장에 표현한 감정 등이 “도저히 성범죄를 당한 사람의 행동 같지 않다”는 평가의 근거가 됐다.
 
하급심들은 무죄 판결 논증에 2012년 5월 대법원 판례를 자주 인용한다. 여고생을 강간했다는 C씨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면서 대법원은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유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 진술의 진실성과 정확성에 거의 의심을 품을 만한 여지가 없을 정도로 높은 증명력이 요구되고 피해자가 한 진술 자체의 합리성, 일관성, 객관적 상당성은 물론이고 피해자의 성품 등 인격적 요소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고 제시했다.
 
분석 대상 판결에선 실제로 피고인 측이 피해자의 평소 행실이나 성격 등 범죄 외적 요소를 들어 피해자를 ‘못 믿을 사람’이라 공격하고 법원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피해자답지 못하다’고 판단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대법원은 같은 해 다른 판결에서 "피해자의 진술이 대체로 일관되는 경우 객관적으로 도저히 신빙성이 없다고 볼 만한 별도 자료가 없는 한 함부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기준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무죄 판결에선 거의 인용되지 않았다. 성범죄 피해자 변호인으로 활동하는 김보람 변호사는 “법원이 여전히 피해자의 전후 행동을 평가할 때 시대착오적 피해자 상을 적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클럽·모텔·유흥업소 등 피해 장소의 성격도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DVD방에서 벌어진 추행 사건에선 “피해자가 문을 열고 나와 직원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는데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관 성폭행 사건에선 “사건 현장을 빨리 벗어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는 이유로 “통상의 피해자답지 않다”는 결론을 냈다.
 
피해자의 진술은 거짓이 아니라면서도 무죄 판결한 사례도 전체 68건 중 19건(23.3%) 있었다. 폭행·협박이 없거나 상황을 오인(誤認) 했다고 본 경우다.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뽀뽀를 하려는 듯 다가온 사건에서 “행동은 부적절했지만 피해자가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고 판단한 게 대표적이다. 준강간 사건에선 “술로 인해 동의를 한 것이 기억나지 않는 블랙아웃(blackout)일 수 있다”고 결론 내린 판결이 종종 있었다. ‘스친 것을 만졌다고 오해했다’는 판단은 전체의 11.6%(8건)였는다. 곰탕집 사건과 사건의 경위, 정황 증거(추행 부위는 가려진 CCTV)가 유사한 ‘스시집 성추행 사건’에서 1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술을 마신 상태로 오해한 것 같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반면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와 가해자는 일면식이 없는 사이고, 가해자가 손을 가져가는 순간 피해자의 몸이 앞으로 쏠리는 걸 고려할 때 ‘엉덩이를 치듯이 만졌다’는 피해자 말이 믿을 만하다”며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
 
이 같은 재판 경향에 대해 수도권 법원의 한 판사는 “일반 대중의 시각에서 80, 90% 범행을 저질렀다는 의심이 들더라도 피고인이 강력하게 부인하는 이상 판사는 10%의 가능성만으로도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 손동권 건국대 로스쿨 교수는 “본질적으로 형사재판도 소송이기 때문에 원고 측(검사)이 입증을 못 하면 피고한테 유리한 구조”라며 “최근에는 전형적인 폭행과 협박이 있었느냐보다 상대방의 의사에 반했는가를 고려하는 추세지만 일관되진 않다”고 말했다.
 
탐사보도팀=임장혁·박민제·이유정 기자
김나윤 인턴(성신여대 화학4)
deep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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