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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만나지 않아도 가르침을 주는 멘토

정여울 작가

정여울 작가

이 세상에는 굳이 만나지 않아도 저절로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 있다. 그가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영혼의 나침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나에게는 그런 두 명의 스승이 있다. 학연과 지연이 아닌 오직 내 마음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바로 그 자리에 든든한 거목처럼 서 계시는 분들이다. 첫 번째 스승은 문학평론가 황광수 선생님이다. 우리 사이에는 무려 30여 년의 나이 차이가 있지만, 나는 한 번도 그런 세대 차이를 느껴본 적이 없다. 나는 선생님께 어처구니없는 농담도 스스럼없이 던지고, 가족에게도 말 못한 비밀스러운 아픔을 이야기한 적도 있다. 선생님 앞에서는 여자와 남자의 차이, 한국전쟁을 겪은 사람과 겪지 못한 사람의 차이마저 사라져버린다. 선생님과 나는 얼마 전부터 ‘향연(饗宴: Symposium)’이라는 테마로 세미나를 하고 있는데, 이건 ‘둘이서도 향연이 가능하다, 공부에 대한 뜨거운 열정만 있다면!’이라는 나의 뻔뻔한 자신감에서 기획된 작은 세미나다.
 
우리 두 사람은 몇 년이 걸리더라도 이 ‘두 사람의 향연’을 마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플라톤의 『향연』으로부터 시작하여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고전의 숲을 오래오래 함께 걸어볼 작정이었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처럼 성대한 연회를 베풀 수는 없지만, 둘이서 커피와 함께 달콤한 마카롱을 곁들여 먹으며 ‘이런 게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향연의 아름다움이구나’라고 감탄하곤 한다.
 
삶의 향기 11/10

삶의 향기 11/10

그런데 얼마 전 선생님께서 큰 수술을 받으셔서 몇 달간 세미나가 중단되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상실감을 느꼈지만 그 아픔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내가 너무 슬퍼하고 걱정하면 선생님께서 더 아파하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그 고된 수술을 마치시고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너무 고통스러운 순간에는 우리들의 ‘향연’을 생각하셨다고. 살아남아서 여울이와 꼭 마쳐야 할 일이 있으니까, 힘을 내셨다고. 나는 수화기 너머로 내 흐느낌 소리가 넘어가지 않도록 신경 썼지만, 선생님은 아셨을 것 같다. 나에게 이 ‘둘만의 향연’이 얼마나 소중한 의미를 지녔는지. 나는 이제 안다. 내가 선생님을 만나지 못할 때도 늘 선생님의 말과 글이 내 곁의 보이지 않는 수호천사처럼 나를 지켜준다는 것을.
 
내 두 번째 스승은 얼마 전에 작고하신 문학평론가 김윤식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실 것이다. 세상은 문학평론가를 ‘인기 있는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나에게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직업은 문학평론가라는 믿음을 처음으로 심어주신 분이 바로 김윤식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 아플 때나 괴로울 때나 늘 ‘최고의 이론으로 최신의 문학작품을 분석한다’는 스스로 정한 생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으셨다.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다. 공부는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업적이 아니며 생을 걸고 모든 것을 바쳐도 될까 말까 하는 무섭도록 정직한 과업임을.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내가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조문을 할 수 없었지만, 마지막 길을 배웅하지 못한 대신 나는 선생님의 그 모든 수업들과 거의 외우다시피 했던 선생님의 책들을 맹렬히 회상했다. 다른 제자들처럼 스스럼없이 다가가지 못한 나의 소심함조차 선생님은 이해해주실 거라 믿으며. 배움이란 스승과의 친밀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르침을 얼마나 삶 속에서 실천하는가로 판가름나는 것이니까.
 
두 분의 삶의 빛깔은 너무도 다르지만 나는 생의 어둠 속에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이 분들의 삶과 글과 눈빛을 생각한다. 내 사회적 필요가 아니라 내 영혼의 목마름이 불러낸 마음의 스승들이 뿜어내는 형형한 눈빛을 생각하며, 오늘도 책을 펴고, 아름다운 글에 밑줄을 긋고, 그 행간의 여백에 나의 감동과 배움의 흔적을 또박또박 쓰고 또 쓴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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