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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부위’‘중요부위’엔 한국 사회의 마음 상태가 담겼다

김영민의 공부란 무엇인가
영화 ‘비스티 보이즈’의 한 장면. 배우 하정우가 여자를 구타하며 ’사랑한다구“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그 ‘사랑’에는 저열한 뜻이 담겨 있다. 이처럼 같은 단어라고 해서 반드시 같은 뜻을 담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영화 '비스티 보이즈' 캡처]

영화 ‘비스티 보이즈’의 한 장면. 배우 하정우가 여자를 구타하며 ’사랑한다구“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그 ‘사랑’에는 저열한 뜻이 담겨 있다. 이처럼 같은 단어라고 해서 반드시 같은 뜻을 담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영화 '비스티 보이즈' 캡처]

죄송합니다, 고객님. 오늘치 인내력이 바닥났습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다. 상대가 무례한 경우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상대가 주섬주섬 조리에 맞지 않는 말을 길게 늘어놓을 때도 그럴 수 있다.
 
조리에 맞지 않는 말의 기본적인 특징은, 사용하는 단어를 부정확하게, 그리고 일관되지 않게 사용하는 것이다. 누군가 단지 멋있게 들린다는 이유 하나로, 하드웨어(hardware)의 문제를 구조적(structural) 문제라고 부르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가 “이 세탁기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라고 하면, 그것은 세탁기 기계 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세탁기 부품이 고장 났다는 뜻이다. 그가 “우리 사회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라고 하면, 그것은 우리 사회 구성 요소들 관계에 지속적인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건설된 댐이나 빌딩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그가 일관되게 하드(hard) 혹은 하드웨어를 구조 혹은 구조적(structural)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기라도 한다면, 그나마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문서 파일을 프린터로 출력해달라고 할 때, “하드 카피(hard copy)”를 한 장 출력해달라고 하지 “구조적 카피”를 한 장 출력해달라고 하지는 않는다.
 
이런 사람이 한강 다리가 붕괴하는 것을 보며, “이 사회에는 구조적 문제가 있어”라고 주장한다면, 과연 한강 다리라는 물리적 대상에 문제가 있다는 말일까, 아니면 부실 건축의 원인이 한국 사회의 틀 자체에 있다는 말일까.
 
 
비핵화 협상 서로 같은 뜻 말하는지 불확실
 
의사소통을 하다가 그만 미쳐버리지 않으려면, 소통 중에 사용되는 유사어 간의 차이를 판별해야 한다. 이를테면, 구름, 수증기, 김과 같은 단어들을 생각해보자. 수증기는 물이 투명한 기체 상태로 된 것이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반면, 구름은 수증기가 작은 물방울, 혹은 얼음 알갱이로 변하여 공중에 떠다니는 것으로서 가시적인 것이다. 김 역시, 수증기가 찬 기운을 받아서 엉긴 작은 물방울로서 수증기와는 다르다.
 
사람들이 거창한 주장을 할 때 종종 들먹이는, 국가, 정부, 사회, 공동체 등의 단어들, 그리고 민족, 겨레, 종족 등의 단어들 역시 유사하지만 다른 단어들이다. 그러한 단어들의 뜻을 제대로 판별하여, 맥락에 맞게, 활용하지 않는 한 정교한 의사소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유교”나 “실학” 같은 단어의 의미를 통제하지 못한 나머지 교착상태에 빠지고 만 한국의 어떤 학술 담론처럼.
 
그런데, 같은 단어라고 해서 반드시 같은 뜻을 담고 있을까? 지난 일 년 동안 한창 언론에 오르내린 “비핵화”라는 단어의 쓰임을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북핵 협상 당사자들이 “비핵화”라는 단어에 같은 뜻을 부여하고 있는지 우리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보다 가까운 예로,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실없이 사용한 적이 있을 법한 단어, “사랑”을 생각해보자. 똑같이 “사랑해”라고 말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말에 각기 다른 의미를 담는다. 감정이 석류처럼 풍부한 A가 “사랑해”라고 하면, 그것은 당신과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자는 말이다. 성욕이 성게알처럼 흘러넘치는 B가 “사랑해”라고 하면, 그것은 당신과 격렬한 성교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반지를 손에 쥐고서 C가 애걸하듯이 말하는 “사랑해”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는 말이다. 생활고에 지친 D가 내뱉는 “사랑해”라고 말은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으니 제발 자신을 혼자 내버려달라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A, B, C, D는 별개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이 생애주기의 여러 국면에서 사랑의 의미를 달리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사랑이라는 단어가 극히 고매한 뜻을 담을 수도, 극히 저열할 뜻을 담을 수도 있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직자가 전례를 집전하면서 “사랑”을 말할 때, 그 사랑에는 고매하고 신성한 뜻이 담겼으리라. 반면, 영화 ‘비스티 보이즈’에서 배우 하정우가 여자를 구타하며 “사랑한다구, XXX아!”라고 외칠 때, 그 사랑에는 실제 영화를 보지 않고는 쉽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저열한 뜻이 담긴다.
 
다른 단어는 꼭 다른 뜻을 지닐까? 다른 단어이지만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경우 역시 많다. 한국 사람들이 모두 잘 알고 있는 “한강”(漢江)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과거에 사용된 “경강”(京江)이란 표현은 한강과는 다른 단어이지만 그 역시 한강을 지칭했다. 그뿐 아니라, 『한서(漢書)』 지리지에 나오는 대수(帶水),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는 아리수(阿利水), 『삼국사기』에 나오는 한수(寒水) 역시 모두 한강과는 다른 단어이지만, 모두 한강을 지칭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이 모두 오늘날 한강을 정확하게 지칭한다고 결론 내리기도 어렵다. 오늘날 한강은 서울 주변을 넘어서는 꽤 긴 물줄기를 지칭하는 데 비해, 경강은 상대적으로 서울 부근의 한강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강 내에서 비로소 한강, 서강(西江), 용산강(龍山江) 등의 세부 강 명칭이 있었다.
 
이처럼 한강이라는 같은 단어가 시대에 따라 다른 대상을 지칭할 수도 있고, 다른 단어들이 같은 강을 지칭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영어의 apple이라는 단어는 사과만 지칭해 온 것이 아니라 둥글게 생긴 여러 과일을 지칭해 온 역사가 있다, 따라서 영어로 된 옛글을 읽다가 apple이라는 단어가 나온다고 그것을 곧바로 사과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역사적인 문헌을 가지고 글을 쓰거나 대화를 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이다.
 
 
모호한 표현도 사회적 합의 땐 이의 없어
 
근래 건국절 관련하여 대한민국 건국 시점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논란의 와중에, “건국(建國)”이라는 말을 담은 과거의 문헌을 증거로 제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 문건에 담긴  “건국”이라는 말이 과연 오늘날 우리가 “건국”이라는 말을 통해 의미하는 바와 동일한가에 대한 논의는 별도로 필요하다. 사극(史劇)에 흔히 등장하는 반정(反正)이라는 말은 어떤가. 궁정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신하가 임금에게 보고하면서, "반정이 일어났습니다!”라고 소리쳐서는 안 된다. 반정은 쿠데타 세력이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나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반정이 일어났다”는 말은 현 임금이 쫓겨나 마땅하다는 뜻을 포함한다. 따라서 그 임금의 충성스러운 신하는 반정이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면 안 된다.
 
심화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단어의 기본적인 뜻뿐 아니라, 관련된 함의까지 숙지해야 한다. "국립”이나 "사립”과 같은 단어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대개 국립대학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국립대학은 나라에서 세운 학교이며,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나라로부터 조달할 것이라는 가정을 하기 쉽다. 마찬가지로 사립대학은 민간에서 세운 학교이며, 재정을 민간에서 조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2010년 지역 국립대 중에서 가장 정부 예산을 많이 받은 곳은 경북대였는데, 그 액수는 2126억원이었다. 반면 사립 연세대는 그보다 많은 2349억원의 예산을 정부로부터 지원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단어의 기본적인 뜻으로 해소하기 어려운 (정치적) 함의가 한국어의 “국립” 혹은 “사립”에 담겨 있음을 보여준다. 즉 단어의 기본적인 뜻만 가지고는 그 단어의 복합적인 함의를 충분히 파악하기 어렵다.
 
일견 자명해 보이는 국립, 사립과 같은 단어가 의외로 전달하는 내용이 분명하지 않은 데 비해, 일견 모호해 보이는 단어가 예상보다 정확한 뜻을 전달하는 경우도 있다. 정육점이나 고깃집에서는 "특수부위”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단골들은 그 말의 뜻을 다 알고 있기에, 도대체 어느 부위가 그토록 특수하단 말인가, 라는 의문을 새삼 제기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언론에서는 성기를 "중요 부위”라고 칭하곤 하는데, 독자들은 다 그것이 성기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기에, 도대체 어느 부위가 그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라는 의문을 새삼 제기하지 않는다. 이처럼 일견 모호한 표현에 대해 높은 사회적 합의가 담겨 있을 경우, 그것은 그 사회의 마음 상태에 대한 의미심장한 지표가 될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 성기보다는 머리를, 혹은 쇄골을, 혹은 목 뒷덜미를, 혹은 복사뼈를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회에서 하필 성기를 골라서 "중요 부위”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에 대해 뭔가 시사하는 게 아닐까.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 꼭 평탄한 사회생활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상대가 사용하는 단어의 정확한 뜻을 물고 늘어지다 보면, 상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오늘치 인내력이 바닥났습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주십시오. 철학자들은 일찍이 말한 바 있다, 명료함은 사람들을 화나게 한다고. (Clarity makes people angry.)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브린모어대학 교수를 지냈다. 영문저서로 『A History of Chinese Political Thought』(2018)가 있으며, 에세이집으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근간)가 있다.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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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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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