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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의 시선] 나이키, 재벌의 ‘청와대 습격사건’, 냉면 목구멍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대통령이 싫어하는 사람을 굳이 광고모델로 기용하는 기업이 있을까. 미국 나이키가 그런 당돌한 마케팅을 감행했다. 지난 9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개XX”라고 비난했던 미식축구 선수 콜린 캐퍼닛을 보란 듯이 ‘저스트 두 잇(Just Do It)’ 캠페인 30주년을 기념하는 광고모델로 모셨다. 한국 사회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캐퍼닛은 2016년 인종 차별에 항의하기 위해 경기 시작 전 국가(國歌)를 제창할 때 일어서지 않고 한쪽 무릎을 꿇는 시위를 벌여 ‘애국심’ 논란을 불렀다. 트럼프는 트위터에서 나이키의 선택에 불만을 표시했지만 그렇다고 나이키 경영자를 백악관으로 불러 곤장을 때리거나 세무조사로 혼내주는 일은 없었다.  
 
대기업이 납작 엎드려있는 요즘 같은 분위기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옛날엔 이런 초현실적인 일도 있었다. 『경제가 민주화를 만났을 때』(이장규 외 지음)에 나오는 아주 오래된 얘기다. 1990년 10월 노태우 대통령이 10대 그룹 회장들을 청와대 만찬에 초청했다. 문배주가 돌고 취기가 오르며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갑자기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이 불쑥 한마디 했다. “물정을 잘 모르는 학자 출신들이 정책을 주도하는 바람에 요즘 나라 경제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 만찬에 배석한 노재봉 비서실장과 김종인 경제수석을 대통령 면전에서 공격한 셈이다. 현직 대통령 앞에서 전직인 박정희 대통령을 칭찬하기도 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박정희 찬가’에 맞장구치면서 “전두환 대통령도 기업인을 잘 이해해준 훌륭한 대통령이었다. 한번 한다고 하면 했다”며 한술 더 떴다. 구자경 럭키금성그룹 회장은 “공장 지을 땅도 못 사게 한다”며 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 정책인 5·8조치를 비판하며 “독재정권이나 하는 식”이라는 말까지 했다. ‘물태우’ 소리를 듣던 노 대통령도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내가 독재자란 말이오?”라며 버럭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아무리 술자리 해프닝이라지만 그 이전의 독재 시절은 물론, 그 이후 어떤 정부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사건이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재벌의 ‘청와대 습격사건’이라고 부를 만하다. 결말이 궁금할 텐데, 별일 없었다. 문제의 발언자들이 괘씸죄로 혼쭐나거나 특별한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물론 각자 대통령에게 사과하고 적잖은 돈을 건넸다고 한다. 정경유착이 심했던 시절 얘기다. 그때로 돌아가자는 건 더더욱 아니다. 28년 전 그 암울했던 시대에도 술기운을 빌었지만 정권과 재계에 최소한의 소통이 있었다는 점이 신기할 따름이다.
 
지난주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을 인터뷰해 ‘마중물만 넣고 펌프질은 안 하니…경제가 시들고 있다’는 기사(11월 2일자)를 썼다.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여야의 협치를 기반으로 패키지딜을 해보자는 제안이 돋보였다. 해외에서 할 수 있는 사업은 원칙적으로 국내에서도 허용하는 쪽으로 규제를 확 풀어 경제를 자유화하되, 불필요한 논란만 부르는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표현은 쓰지 말고 그 내용인 복지나 사회안전망을 더 강화하자는 그의 주장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았다.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그제 국회 예결위에서 “경제에 관한 정치적 의사결정의 위기”라고 현재의 난국을 표현한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터뷰에 충분히 소개하지는 못했지만 변 전 국장은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 ‘법 앞의 평등’을 강조했다. 검찰을 비롯한 공권력의 과잉을 지적한 것이다. 지금 기업들은 어디서 무슨 돌멩이가 날아올지 몰라 정부 눈치 보기 바쁘다. 원치 않는데 방북해야 했고, 힘겹게 냉면을 목구멍으로 넘겨야 했다. 법과 원칙을 지키기만 하면 두려움 없이 경제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도 나이키 같은 기업이 나오고, 트럼프와 각을 세우는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같은 경영자가 나올 수 있어야 한다.
 
대기업 봐주자는 것도, 복지를 그만 늘리자는 것도 아니다. 공정한 시장의 규칙을 어기는 대기업은 법대로 처벌하면 되고, 구조개혁을 위해 필요한 복지는 선제적으로 늘릴 필요도 있다. 하지만 세상만사엔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다. 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 최저임금, 52시간제, 정규직 늘리기, 협력이익공유제 등 부처별로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기업 정책을 한쪽에 다 모아보라. 기업이 왜 주눅 들어있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개별의 합이 전체가 아닐 수 있듯, 각 부처가 추진하는 개별 정책이 정의롭다고 모든 기업정책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어느 전직 경제장관은 문 정부 정책을 평가해달라는 주문에 “골프 치면서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니 뒤땅 때리기 십상”이라고 촌평했다. 정의와 의욕만 앞세우지 말고 경제는 순리대로 정책을 펴라는 조언이다. 복지도 마찬가지다. 급하다고, 시장 상황이 나쁘다고 임기응변식으로 재정을 쏟아부어선 안 된다. 일단 정부 돈이 한번 나가면 당연한 권리가 되고 나중에 되돌리기 힘들다. 기업정책도 복지도 정교하게 우선순위를 다시 정하는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새로운 경제팀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꽉 막힌 경제가 돌아가고 일자리도 생긴다.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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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