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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평화를 경제와 싸움 붙이는 나라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평화와 경제가 뜬금없이 드잡이질을 할 판이다. 자유한국당은 지난주 “경제가 평화다”며 8·15 경축사 때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평화가 경제다”를 되치기했다. 한국당 관계자는 “경제보다 평화(북한)를 우선순위에 놓겠다는 대통령에 대한 반박의 의미”라고 했다. 대통령은 1일 국회 연설에서 다시 ‘평화가 경제’라고 강조했다. 평화든 경제든, 어느 한쪽 편을 들 생각은 없지만 한번 따져보자.
 
‘평화가 경제’란 말은 백번 옳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북핵 리스크는 여전히 국가 신용등급에 큰 영향을 미친다. 무디스 같은 세계 3대 신용평가회사가 한국 경제 평가를 위해 방한하면 국가정보원 북한 담당자를 꼭 만나 설명을 듣는다는 사실은 이제 비밀도 아니다. 북한 리스크가 줄면 한국 경제의 리스크도 준다. 그렇다고 평화만으로 경제가 잘 굴러갈 수는 없다. 경제의 거울, 요즘 증권시장이 산증인이다.  
 
지난달 한국 증시는 급락했다. 낙폭은 세계 최대였다. 우리보다 미·중 무역전쟁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대만보다 더 떨어졌다. 기업들 몸값은 유례없이 싸구려 취급을 받고 있다. 10월 말 현재 한국 증시의 주가 순수익비율(PER)은 8배, 주가순자산비율(PBR)은 0.9배로 터키·러시아와 비슷하다. 한국 증시, 한국 기업이 외환위기 직전인 터키 수준이라는 게 말이 되나. ‘평화가 경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부 말대로면 남북 관계며 평화의 기운이 이렇게 좋고 높았던 적이 없지 않은가.
 
정부의 답변은 한결같다. “펀더멘탈은 든든하다”다. 그러면서 외국인 자금 이탈엔 “이유를 알 수 없다”며 입을 다문다. 증권가의 시각은 다르다. 열이면 열, “투자 심리가 완전히 죽었다”고 말한다. A자산운용 사장은 “외국인은 말할 것도 없다. 우선 부자들이 떠난다. 사업체 팔고, 한국 주식 팔고, 부동산 사고, 미국 주식을 산다. 국민연금마저 국내 주식을 외면한다. 한국 기업, 한국 경제에 내일이 없다는 뜻이다”고 말했다.
 
주식시장은 미래를 사는 곳이다. 미래에 수익을 낼 만한 기업이 없다면 주식을 살 이유도 없다. 올해 현대·기아차의 영업이익은 한창 때의 10분의 1 토막이 났다. 혼자 버텨온 반도체 초호황도 끝물이다. 반도체를 뺀 30대 기업의 올 상반기 영업이익은 지난해보다 16.3% 줄었다. 내년엔 주 52시간제가 본격 시행되고, 최저임금은 10% 또 오른다. 기업엔 돈 나갈 일만 있다. 이런 나라, 이런 증시에서 돈을 안 빼면 그게 이상하다.
 
‘북한 올인’이 평화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미국 재무부가 국내 은행들에 경고하고, 주한 미대사관은 5대 그룹에 대북사업 속도 조절을 주문했다. 그것도 한국 정부를 통하지 않고 직접 나섰다. 북한 서열 100위쯤 되는 이선권이 고작 냉면 한 그릇 먹여주면서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며 한국 최고 기업인들을 겁박했다. 이쯤 되면 외국인 투자자도 안다. 북한으로 쏠리는 이 정부의 구심력이 한·미 동맹을 밀치는 원심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권시장에서 ‘북한이 먼저다’ ‘한국 경제를 북한 수준으로 망가뜨리는 게 목표냐’라며 원성이 나오는 걸 가벼이 듣지 말아야 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비난에 정부는 물론 억울할 것이다. 터무니없는 ‘가짜뉴스’에 화도 날 것이다. 하지만 한번 호흡을 다듬고 다시 생각해 보라. 왜 그런 말이 나오는지. 정부가 자초한 건 없는지. 거친 표현에 가렸지만, 증시의 바람은 하나다. 경제를 살려 달라, 말을 마차 앞에 놓아달라는 주문이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북한보다 경제”라고 한마디만 하면 될 일이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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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