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유성운의 역사정치] 러시아도 제압한 조선 조총부대는 왜 사라졌을까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선보인 조총의 위력에 충격을 받은 조선은 범국가적 역량을 투입해 조총 개발에 착수했다. 50여년 후 벌어진 나선정벌(1654ㆍ1658년)에서 조선이 파견한 조총부대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사진 싸이런픽쳐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선보인 조총의 위력에 충격을 받은 조선은 범국가적 역량을 투입해 조총 개발에 착수했다. 50여년 후 벌어진 나선정벌(1654ㆍ1658년)에서 조선이 파견한 조총부대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사진 싸이런픽쳐스]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그려진 대한제국 육군의 모습은 오합지졸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정규군보다 의병에 가담한 포수들의 실력이 훨씬 빼어나 드라마에선 이들의 맹활약에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군의 사격술은 한 때 동아시아, 아니 어쩌면 세계에서 수준급으로 인정받을 만큼의 실력을 갖춘 적도 있었습니다. 소위 ‘국뽕’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단지 시작은 매우 미약했고, 첫 만남도 우호적이진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조선이 조총에 눈 뜨다
 
“왜노가 비록 전투에 익숙하고 날래게 진군했으나 그들이 승리를 얻은 것은 실로 이 조총 때문이다.” (이수광, 『지봉유설』)
 
날아가는 새도 잡는다고 이름 붙여진 조총(鳥銃)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에겐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화살과 달리 맞으면 즉사하는 경우가 많은데다 소리도 요란했기 때문에 수 백명이 연달아 조총을 쏘면 말 그대로 ‘혼비백산’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합니다.
 
조총병을 앞세운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왔습니다.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군 1만8000명이 부산포에 상륙해 다음날 3시간만에 부산진성을 점령했고, 이튿날엔 2시간만에 동래성을 공격해 함락시켰습니다. 이어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이 이끄는 조선 최정예 부대를 전멸시키고 5월 3일에 한양에 입성했으니, 한반도에 상륙한지 불과 20일만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 지도층에서는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조총을 확보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 이듬해인 1593년 2월부터 조선은 훈련도감과 군기사에서 조총을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조총 쏘는 법도 가르치고 무과 과목에 조총 분야를 신설했습니다. 또한 개발에 참고할 ‘샘플’ 확보에도 힘쓰죠.
 
“지금부터 전장에서 얻은 조총은 함부로 사용하지 말고 모두 거두어 각 진의 군사들로 하여금 이를 학습하게 합시다. 그리하여 그 이치를 터득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성의있게 가르치도록 하소서.” (『선조실록』 26년 11월)
 
1594년엔 유성룡이 도제조가 되어 조총과 화약제조를 책임지게 됩니다. 일찍부터 조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당시 몇 안 되는 지도층 인사였기 때문입니다. “『기효신서』(명나라 군사서적)에서 말하기를 조총은 명중하는 묘가 활이나 화살보다 다섯 배나 되고 쾌창보다 열배나 된다.”(『서애집』)
 
해상에서 싸운 이순신도 한 때 조총을 자체 연구했습니다. 휘하 군관 등에게 조총을 연구하도록 해 1593년 8월엔 일본 조총과 비슷한 정철총통(正鐵銃筒)을 만들어 조정에 진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성능이 썩 좋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불과 넉달 뒤 선조는 “우리가 만든 조총은 거칠게 만들어서 쓸 수가 없다. 이제는 왜인의 정밀한 조총을 기준으로 삼아 일체 그대로 제조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으니까요. 결국 자체 개발에 한계를 느낀 조선 조정은 발상을 전환하게 됩니다.
 
 
왜인 포로, 조총 개발에 투입되다
 
‘동래부사순절도’. 동래성은 일본군의 압도적 전력에 밀려 2시간만에 함락됐다. [중앙포토]

‘동래부사순절도’. 동래성은 일본군의 압도적 전력에 밀려 2시간만에 함락됐다. [중앙포토]

선조는 투항한 왜인들로부터 조총과 화약의 제조법을 적극 수용해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자체 개발이 안 되니 기술 인력을 확보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튼 거죠.
 
“이번에 생포한 왜인이 염초 굽는 법을 안다고 한다. 이 왜인은 죽여 보았자 이익이 없을 것이니 목숨을 살려주어 속히 장인을 데리고 그 방법을 다 알아내도록 병조판서 이항복에게 은밀히 전하라.” (『선조실록』 26년 3월 11일)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 장관인 이항복에게 밀명을 내려 적군 포로를 처형하지 말고 조총에 필요한 기술을 빼내도록 지시한 것이죠. 석 달 뒤엔 처우에 특별히 신경쓸 것을 당부합니다.
 
“생포한 왜인 2명 가운데 한 명은 염초를 구울 줄 알고, 한 명은 조총을 만들 줄 안다고 하니 염초를 굽는 자는 영변으로 보내 가을부터 시작하면 많은 염초를 구워낼 것이고 조총 만드는 자는 철이 생산되는 고을에 보내면 많은 조총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왜인들에게 아직도 족쇄를 채웠다고 하는데, 죽이지 않기로 작정하였다면 이와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족쇄를 풀어주는 것이 어떻겠는가.”(『선조실록』 26년 6월 16일)
 
“왜인이 투항해 왔으니 후하게 보살피지 않을 수 없다. 묘술을 터득할 수 있다면 적국의 기술은 곧 우리의 기술이다. 왜적이라 하여 그 기술을 싫어하고 익히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고 착실히 할 것을 비변사에 이르라”(『선조실록』 27년 7월 29일)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 장수로 싸우다 조선에 귀화한 김충선도 이때 활약합니다. 그의 아들 김경원에 따르면 “아버지(김충선)가 투항한 후 1593년 조정은 훈련청을 설치하고 항왜(항복한 왜군) 300명을 모집해 화약을 만들고 화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조선의 조총 개발 성공 이면엔 투항한 일본인들의 노하우 전수가 있었습니다.
 
 
러시아군을 격파한 조선 조총부대
 
노력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임진왜란 막바지인 1597년 1월 판중추부사 윤두수가 조총을 제조할 줄 아는 투항한 왜인을 서울로 불러 조총을 제작케 하자고 건의하자 선조는 “우리 장인들도 역시 잘 만든다”며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자체 제작 기술이 만족할 수준에 올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조선의 조총 개발이 꽃을 피운 건 반 세기 가량 지난 나선정벌입니다. 청나라는 아무르강 일대까지 진출한 러시아 군대와 충돌했는데, 전력에서 열세를 보이자 조선에 조총 부대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조선·청 연합군은 러시아군에 맞서 승리를 거뒀는데 청나라 측은 당시 맹활약한 조선 조총 부대의 실력에 크게 놀라기도 했습니다. 1차 나선정벌의 성과에 고무된 청나라 측은 2차 나선정벌에서도 조총부대 파병을 요구했습니다. 이 때 조선의 베테랑 사수 200명이 투입됐는데, 이들은 청나라 측 조총부대의 요청으로 시범 사격을 보일 정도로 이미 압도적인 실력차를 인정받은 상황이었습니다.
 
2차 나선정벌에서 조·청 연합군은 대승을 거둡니다. 러시아군은 전사자 220명을 낸 반면 조선군은 8명에 불과했습니다. 러시아의 남하는 중단됐고, 청과 러시아는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현재 영유권을 인정하는 선에서 마무리 됐습니다.
 
당시 유럽에선 일정 대형을 갖추고 일제 사격을 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지만 전국에서 특등 사수들로 엄선된 조선 조총수들은 머스킷으로 조준 사격해 명중률이 높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총이 조선의 역사 기록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이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조선은 이후 200여년 간 전란이 없었고, 지배층들은 붕당정치에 휩쓸리면서 국방력 확보보다는 성리학적 질서 확립에 골몰하게 됩니다. 또한 삼정의 문란으로 조세 질서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기술 개발은 커녕 조총 부대를 유지할 국방비조차 확보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죠.
 
이후 병인양요나 신미양요 등의 역사를 보면 조선 조총 부대의 활약상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신미양요에서도 조선군은 전사 343명이 발생했지만 퇴각한 미군은 전사자 3명에 그쳤습니다. 200여년 전 나선정벌에서 러시아군의 발길을 멈추게 한 것과 달리 조선의 열악한 전력은 열강들의 침략을 막는데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얼마 전 사이먼 테일러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원전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이 탈원전을 하려는 이유가 궁금하다”며 “시간이 지나면 해외 원전 수주도 어려워져 산업 기반이 와해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유력하다고 기대를 모았던 영국의 원전 수주가 실패하면서 나온 지적입니다.
 
원전 기술은 우리가 원조는 아니지만 수 십여년에 걸쳐 국가적 육성 노력과 많은 세금을 투입해 세계적인 수준을 갖게 된 산업입니다. 이제 그 결실을 수확할 때였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정권 교체마다 정치적 판단에 따라 핵심 산업의 흥망이 좌우된다면 두고두고 후회스러운 일이 되지는 않을까요.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