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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물 방치 뒤 완공까지 24년···北 105층 유경호텔 트라우마

북한, 무역사이트 개설한 이유는
대북 제재의 고삐가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 미국과 국제사회가 북한 김정은 체제의 ‘비핵화’ 이행 의지가 시원치 않다는 판단을 내린 때문이다. 제재의 뒷문이 열려있다는 일각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평양 내부에서는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온다. 제재 해제에 대한 기대가 실망감으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올겨울 노동당과 군부의 외화벌이 기관은 물론 파워엘리트 집단에게 힘든 시기가 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이런 가운데 제재 완화나 해제를 준비하는 북한 내부의 움직임도 포착되고 있다. 해외투자 유치를 위한 전용 인터넷 사이트가 등장해 주요 대상 사업과 법 제도 등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중소 규모 호텔 리모델링 등 외국 관광객 방문 대비에 초점이 맞춰져 눈길을 끈다.
  
평양 시내에서 바라본 유경호텔. [평양사진공동취재단]

평양 시내에서 바라본 유경호텔. [평양사진공동취재단]

88서울올림픽을 목전에 둔 1987년 8월 평양 보통강구역에선 북한 최대 규모의 호텔 공사가 시작됐다. 대동강변 버드나무가 많았던 평양의 옛 이름을 딴 유경(柳京)호텔이다. 피라미드식으로 건설된 이색적인 외양에다 105층이란 규모는 화제가 됐다. 하지만 북한 경제 시스템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극심한 경제난에 빠졌고 소련과 동구권 붕괴 등의 여파로 공사는 지지부진했다. 92년 4월 김일성 출생 80회를 맞아 완공될 예정이었지만 차질을 빚었다. 녹슨 채 방치돼 평양의 흉물로 불리던 유경호텔은 2008년 이집트 통신그룹 오라스콤 투자로 3년 뒤 가까스로 공사가 마무리됐다. 하지만 북한 지도부에겐 남북 체제경쟁에서 참패한 북한의 실상을 보여주는 보기 싫은 유물로 옹이처럼 남았다. 호기롭게 ‘주체 건설’ 운운했지만 외국 기업의 손을 빌려서야 겨우 완공할 수 있었던 트라우마도 만만치 않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권력이 넘겨진 이후에도 북한 경제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었다. 1994년 김일성 국가주석 사망 직후부터 시작된 ‘고난의 행군’은 대량 아사 사태 등으로 북한 체제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였다. 2002년 7·1 경제관리 개선 조치와 각종 투자유치 구상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핵 개발과 미사일 도발로 인한 대북 제재는 북한 경제의 숨통을 더욱 조였다. 이런 국가체제를 이양받은 28살의 청년 지도자 김정은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인 건 당연했다. 집권 초 대표적 놀이공원인 만경대유희장을 방문했을 땐 폐허가 되다시피 한 시설을 한탄하며 직접 허리를 숙여 잡초를 뽑았다. 자신이 스위스 조기유학 때 경험한 세계적 명성의 워터파크와 유람선·스키장을 본떠 평양과 지방 도시에 대규모 건설사업을 벌였지만 그뿐이었다.
 
노동당과 경제관료 등이 다시 경제건설과 해외 자본 유치를 언급하기 시작한 건 올해 들어 북한이 대남·대외 유화노선으로 선회하면서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평양의 트럼프 타워’까지 떠올리며 미국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에 나설 수 있을 것임을 알렸다. 문재인 정부도 철도·도로 등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추진하기 위한 대북제재 우회전략 등을 다각도로 모색 중이다.
 
‘비핵화’에 뻣뻣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듯 하지만 북한도 제재 해제 이후를 준비하는 징후가 드러난다. 지난달 중순 오픈한 대북투자 유치 인터넷 사이트 ‘조선의 무역(http://www.kftrade.com.kp)’에는 해외자본을 끌어들이려는 북한 당국의 생각이 드러난다. 이곳엔 북한의 무역 정책과 법규·투자 대상·경제개발구는 물론 주요 상품도 사진과 함께 구체적으로 소개돼 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숙천농업개발구와 신평관광개발구·어랑농업개발구·청진경제개발구·와우도수출가공구 등 평양의 주요 경제개발구를 소개하고 개발 방식(합영 또는 외국기업 단독개발)·투자 희망액·부지 위치·임대 기간 등을 안내하고 있다. 경제개발은행과 조선경제개발협회·조선대외경제교류협회 등 주요 기관 연락처도 함께 공개됐다. 매년 개최되는 평양국제전람회도 소개하고 있는데, 내년 5월 20~24일 열릴 예정인 ‘제22차 평양봄철국제상품전람회’ 세부계획을 공개하고, 참가 신청을 위한 중국 주재 4개 기업소 담당자의 연락처(휴대전화·이메일)도 안내하고 있다. 대북투자 유치를 위한 해당 기관들의 적극적인 행보를 읽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주목되는 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최근 힘을 실어주고 있는 원산갈마해안광광지구 건설 관련 부분이다. 원산-금강산 국제관광지대의 호텔과 발전소·철도·식당·편의시설 등 투자 대상 14곳을 ‘조선의 무역’ 사이트는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가운데 호텔이 7개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동명호텔과 송도원호텔·해안호텔을 리모델링하고 동정호호텔과 시중호텔·총석정호텔 등을 새로 건설한다는 게 북한 측의 설명이다. 각 대상별로 상세한 구상도 제시하고 있는데, 송도원호텔의 경우 207개 객실에 407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1000석으로 늘려 5성급으로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인터넷 사이트에 공개했다. 북한은 “금강산과 총석정·마식령스키장·명사십리 등 관광명승지의 중심 위치에 놓여있는 원산 관광객을 위한 숙박 능력은 현재 1500명 규모로 하루 4000명으로 예견되는 방문 숫자에 비해 숙박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밝히고 있다. 북한 국가설계지도국의 ‘원산-금강산 관광지구 개발 총계획’ 에 따르면 오는 2025년까지 78억 달러(약 8조5000억원 규모)를 투입해 원산-금강산 지역을 국제관광지구로 조성한다는 방침이다.
 
이 지역에 구체적 투자유치 구상이 공개된 건 김정은 위원장의 원산 챙기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북한 고위 인사들은 ‘원산 관련 사업이나 지시는 무조건 선차적(최우선)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판단이 노동당과 내각·군부 핵심 인사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고 방북 교포 인사 등에게 귀띔한다. 원산 갈마공항 옆 해변 송림 일대에 건설 중인 대규모 해양리조트에는 최정예 군인 건설자와 돌격대 등이 총동원됐다. 평양시 뉴타운 건설에 투입됐던 인력과 장비·물자도 갈마지구에 집중 투입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는 원산과 김 위원장의 인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대북정보 관계자 "김정은의 생모 고용희가 재일교포 북송선을 타고 처음 도착한 곳이 원산이기 때문에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용희가 한때 북한 권력 내부에서 ‘원산댁’으로 불렸다는 첩보도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달 말 원산 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 현장을 방문했다. 그는 대북제재를 비난하며 해양리조트 건설이 "적대세력들에게 들씌우는 명중 포화”라고 말했다. 주민 불만을 누그러트리고 공사에 속도를 내기 위한 대내용 언급일 수 있다. 하지만 비핵화 합의 실행을 머뭇거리며 모든 탓을 대북제재로만 돌린다면 북한이 맞닥트린 답답한 현실을 돌파할 리더십은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 이 기사의 취재·제작에는 정영교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원이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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