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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백수, 취업 경쟁자를 하나씩 죽이는데…

기자
김성희 사진 김성희
[더,오래] 김성희의 천일서화(9)
‘헬조선’ 운운하는 이들에게 이의 있다고 했다. 딱히 이뤄 놓은 것도 없고, 그다지 모아 놓은 것도 없지만 나는 여전히 ‘헬조선’이 못마땅하다. 문제는 많지만 그래도 나아질 여지 혹은 기미가 있어 이 땅은 여전히 살 만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를 꼬집어 이야기하자면 70년대 4대 에세이스트 중 한 명으로 꼽혔던 김소운이 대표작 『목근통신』(삼성문화재단) 말미에 실린 글에 격하게 공감하는 편이다.
 
70년대 4대 에세이스트 중 한 명으로 꼽혔던 김소운. [중앙포토]

70년대 4대 에세이스트 중 한 명으로 꼽혔던 김소운. [중앙포토]

 
일본에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에서 그가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태어났다면 더 많은 일을 했을 거라고 안타까워하는 미국 친구에게 김소운은 그런다. “내 어머니(모국)는 레프라(문둥이) 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어머니를 클레오파트라와도 바꾸지 않겠습니다”라고. 이런 걸 글쟁이의 단순한 수사(修辭)라고만 하기엔 너무 비뚤어진 것 아닌가.
 
어쨌거나 우리가 처한 현실이 문제투성이인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문제는 그렇게 만든 가해자 또는 ‘나쁜 놈’을 꼬집어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번에 소개하려는 책도 그런 현실을 그려냈다. 추리소설 『액스』(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오픈하우스)는 생산성 우선이라는 시장경제의 도도한 물결에 떠밀려난 보통사람이 주인공이다.
 
때는 1997년. 미국 코네티컷주에 사는 주인공 버크 데보레는 쉰한 살이고 제지업체에서 23년간 따뜻한 세월을 보내다가 회사가 합병되면서 정리해고된 지 2년이 됐다. 아내 마저리와 십대의 딸, 아들이 있다. 실직 2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데보레에 따르면 “봉급날을 한 번 지나치면 불안감에 잠을 이룰 수 없다. 봉급날을 매번 지나치면 그야말로 공황 상태에 빠져버리고 만다.” 남편이 곧 재취업할 거라고 믿던 아내 마저리는 헬스클럽과 사교모임 대신 독서로 소일한다. 난시청 지역임에도 유료 케이블 채널을 끊고, 식탁은 양고기와 생선 대신 닭고기와 파스타로 차린다. 슈퍼마켓에서 더 이상 카트를 느릿느릿 밀지 않는다.
 
구직 활동에 잇달아 실패한 데보레는 “아무 생각 없는 소 떼에 끼어 들어가 크고 어두운 도살장으로 비틀비틀 향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회사는 기록적인 흑자를 내는데 자기 같은 중간관리직은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자동화에 밀려 “소금을 뿌린 민달팽이처럼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액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오픈하우스.

액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오픈하우스.

 
자기만 한 경력과 의욕, 능력을 갖춘 재취업 희망자가 넘쳐난다는 사실을 절감한 데보레는 위장 구인광고를 낸다. 당초엔 제지업계 재취업에 잠재적 경쟁자들의 노하우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자신보다 나은 조건의 경쟁자 등 7명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데보레는 이를 내 가족, 내 인생을 살리는 ‘명백한 정당방위’라고 여긴다. “자신밖에 믿을 사람이 없고” 홀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그로선 “경쟁에선 어떻게든 이겨야 하니까”라고 합리화하기도 한다. 먼 옛날 에스키모들이 나이 든 부모들을 빙산에 놓아두었지만 현대 사회는 가장 생산적인 한창때의 사람들을 마구 폐기처분하는 게 미친 짓이라 항변하면서.
 
소설은 데보레가 경쟁자들을 차례차례 죽여 가는 이야기다. 표적의 아내를 함께 죽이는 ‘사고’도 저지르고, 인간적 유대를 맺기도 하고, 같은 총을 쓰는 바람에 경찰의 조사를 받기도 하고….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결말을 밝힐 수는 없지만 머리싸움을 할 필요도 없고, 액션이 두드러지지도 않으니 이 작품은 이른바 ‘사회파 추리’이다. 범인의 관점에서 일인칭으로, 재미보다는 중산층의 몰락을 섬뜩하게 그려내는 데 무게 중심이 있어서다.
 
“몹시 가난하거나 아주 부자인 사람들은 인생에 극단적인 굴곡이 많다는 걸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중산층은 인생의 매끄러운 진행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우리가 조금이라도 미끄러지면 처참하게 내팽개쳐진다.”
 
고소득 계층으로의 진입을 포기했으니 우리를 밑바닥으로 내몰지는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회사에 충성했으니 끝까지 생계를 책임져줘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물음을 던지면서 데보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날 선 도끼를 휘두른다.
 
추리소설을 낮춰 보는 이들에게 권하는, 추리소설 이상의 추리소설이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jaeja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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