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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도요토미 눈에 든 조선 사기, 日 건너가 국보 됐다

지난 2002년 발굴된 웅천 사발 가마터. 창원시 진해구 웅천도요지전시관 위쪽에 있다. 위성욱 기자

지난 2002년 발굴된 웅천 사발 가마터. 창원시 진해구 웅천도요지전시관 위쪽에 있다. 위성욱 기자

최웅택 사기장. [사진 웅천요]

최웅택 사기장. [사진 웅천요]

“제가 죽기 전 소원이 있다면 이 가마터를 복원해 조선 사발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500여년간 끊긴 조선 사발의 진정한 재현이 이뤄질 수 있을 겁니다.”  
 

지난 3일 조선 도공 125명 추모제 개최
“500년간 끊긴 조선 사발 진정한 재현”

지난 3일 경남 창원시 진해구 두동 웅천도요지전시관에서 만난 최웅택(64) 사기장은 2002년 발굴된 6기 가마터를 바라보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오후 후학들과 함께 잊힌 조선 도공 125명을 위한 19회 추모제를 올린 직후였다.  
 
웅천 보개(배)산 정골(井谷)에 위치한 웅천도요지의 옛 가마터(현 전시관 부근)는 1500년대 초부터 ‘막사발’을 굽던 곳이다. 사발은 우리의 생활 그릇으로 고려청자부터 조선 시대 백자, 또는 분청사기로 만들어졌다. 국그릇이나 찻그릇, 사찰 공양 그릇 등으로도 쓰였다. 막 쓰는 그릇이라는 의미의 ‘막’을 붙여 ‘막사발’로도 불렸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웅천 도공 125명에 대한 추모제를 올리고 있는 최웅택 사기장. 위성욱 기자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웅천 도공 125명에 대한 추모제를 올리고 있는 최웅택 사기장. 위성욱 기자

웅천도요지전시관 위쪽에 있는 옛 가마터. 위성욱 기자

웅천도요지전시관 위쪽에 있는 옛 가마터. 위성욱 기자

 
하지만 1598년 100년을 채우지 못하고 이곳은 폐요 됐다. 정유재란이 끝날 무렵 웅천도요지의 도공과 그 가족 125명이 퇴각하는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면서 가마터의 불이 꺼졌고, 그 명맥이 끊긴 것이다. 
 
조선 찻사발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16세기 후반부터 일본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당시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서 가져간 찻사발을 ‘이도다완’이라 부르며 차회(茶會)를 열었고, 그때 사용한 찻사발이 일본 국보 26호로 지정된 ‘기자에몬 이도다완’이다. 그때부터 조선 사발은 이도다완으로 불렸고, 이후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일본 나가사키 히라도 섬 등 각지에서 찻사발을 만들었다. 이도다완은 아직도 일본에서 최고의 찻사발로 칭송받고 있다.  
이도다완의 모습. [중앙 포토]

이도다완의 모습. [중앙 포토]

이도다완의 모습. [사진 경운박물관]

이도다완의 모습. [사진 경운박물관]

 
이 사발을 500여년 만에 조선사발의 유래지 중 한 곳인 웅천에서 재현하면서 조선 사기장의 맥을 잇고 있는 사람이 바로 최웅택 사기장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극찬한 이도다완도 웅천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최 사기장 등은 추정하고 있다.  
 
최 사기장은 진해 보개산 인근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산기슭 곳곳에 훑어져 있는 사발의 파편들을 자연스럽게 접했다. 이후 30여년 전부터 보개산 기슭에 ‘웅천요’라는 가마를 열어 조선 사발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최 사기장은 “수십년간 산속에 묻혀 있는 사기 조각이 스승이고, 나의 학습장이었다”며 “일본에 건너간 옛 선조들과 그 후손들이 만든 작품을 보며 막사발을 재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웅천요 내부에 진열된 옛 조선 사발의 파편들. 위성욱 기자

웅천요 내부에 진열된 옛 조선 사발의 파편들. 위성욱 기자

최웅택 사기장이 가마에 불을 넣고 있는 모습. [사진 웅천요]

최웅택 사기장이 가마에 불을 넣고 있는 모습. [사진 웅천요]

 
최 사기장은 거의 매일 보개산을 오른다. 찻사발에 쓰일 가장 중요한 재료인 삼백토(백색·황색·적색)를 구하기 위해서다. 최 사기장은 “다른 지역의 흙으로 빚으면 그건 더는 웅천 사발이 아니다”고 말했다. 
 
캐온 삼백토를 소나무 가지에 얹고 그 위에 빗물을 부어 걸러낸 뒤 숙성시키면 점성을 가진 점토가 된다. 이 점토를 물레에 올려 찻사발을 제작한 뒤 굴 껍데기를 이용해 만든 유약을 바른다. 조선 도공이 했던 방식 그대로다. 
 
손님을 맞는 그의 응접실에는 보배산에서 주어온 사발의 파편들이 즐비하다. 도예를 배운 적 없는 최 사기장에게 그 파편들은 유일한 스승이었다. 최 사기장은 “이 파편들을 보면서 흙, 유약, 물레질, 불의 강약 등 사발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말 없는 스승이다”고 말했다.  
최웅택 사기장이 재현한 웅천 막사발. 위성욱 기자

최웅택 사기장이 재현한 웅천 막사발. 위성욱 기자

지난 3일 웅천도요지전시관 위쪽 옛 가마터에서 웅천 도요의 후예들이 선조들이 작업하던 가마터에 절을 올리고 있다. 위성욱 기자

지난 3일 웅천도요지전시관 위쪽 옛 가마터에서 웅천 도요의 후예들이 선조들이 작업하던 가마터에 절을 올리고 있다. 위성욱 기자

 
웅천 찻사발의 가장 큰 아름다움은 자연미와 소박함이다. 최 사기장이 만드는 조선 사발도 이런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물레에 올려진 점토를 성형할 때 여러 번 다듬지 않고 투박하고 남성적인 미를 살린다. 그래서 거친 물레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고 유약을 바를 때 사발을 쥔 굽에 손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게 일 년에 3~4차례 가마에 불을 땐다. 1000여개의 사발이 가마에 들어가지만 살아남는 건 불과 10여점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모두 깨 땅에 묻어 버린다. 
 
현재 최 사기장에게 사발 만드는 법을 배운 제자는 10여명이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최 사기장과 함께, 일부는 독립해 웅천도요의 맥을 잇고 있다.
 
웅천도요지전시관 내부의 모습. 위성욱 기자

웅천도요지전시관 내부의 모습. 위성욱 기자

웅천도요지전시관 내부에 전시된 조선 사발의 모습. 위성욱 기자

웅천도요지전시관 내부에 전시된 조선 사발의 모습. 위성욱 기자

최 사기장에게는 마지막 소원이 있다. 발견된 가마터 중 원형이 보존된 가마터에서 조선 사발을 재현하는 것이다. “흙으로 사발을 굽는 사람이 무슨 욕심이 있겠어요.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선조들의 가마터에서 옛 방식 그대로 조선 사발을 구워보는 것이 제 마지막 남은 소원입니다.”
 
창원=위성욱 기자 w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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