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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빨리 가신 성일이형, 영원한 별로 남으실 겁니다

배우 신성일씨가 지난달 4일 부산영화제 개막식에서 손가락 하트 모양을 만들고 있다. [연합뉴스]

배우 신성일씨가 지난달 4일 부산영화제 개막식에서 손가락 하트 모양을 만들고 있다. [연합뉴스]

성일이 형님 영전에-.
 

‘별들의 고향’ 이장호 감독의 편지
“암과 싸우면서도 새 작품만 생각”

성일이형, 어제 밤새 형님 얼굴을 그려보았습니다. 서울에서 갑자기 날아온 연락에, 형님이 위태롭다는 비보에 마음이 허전하고, 무겁기만 했습니다. 오늘 아침 타계 소식을 확인했습니다. 비통하고 비통할 뿐입니다.
 
저는 지금 일본에 있습니다. 도쿄 메지로(目白)대학에서 4년 전부터 매년 열어온 ‘이장호 영화제’에 참석 중입니다. 올해에는 ‘바보선언’(1983)을 틀었습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에 형님이 있다는 걸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저의 감독 데뷔작 ‘별들의 고향’(1974)이 당시 관객 46만 명이란 엄청난 흥행을 한 데에는 누구보다 형님의 공이 컸다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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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은 저보다 여덟 살 연상이시죠. 제가 신상옥(1926~2006) 감독이 세운 신필름 연출부로 있을 때 형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최고 스타였던 형님을 ‘성일이형’ ‘성일이형’ 하며 따랐던 게 어제 같습니다. 이후 ‘너 또한 별이 되어’(1975),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2) 등 형님과 함께한 작품은 몇 안되지만 그래도 형님은 제 영화 인생을 바꿔놓은 선배 중 선배입니다.
 
형님은 출연작 500여 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김기덕 감독님의 ‘맨발의 청춘’(1964), 이만희 감독님의 ‘만추’(1966), 그리고 ‘별들의 고향’ 셋을 꼽곤 했습니다. 애송이 감독이었던 제가 한국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쓰게 된 건 ‘별들의 고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영화에서 화가 문호(신성일)가 호스티스 경아(안인숙)에게 건넨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은 지금도 회자되는 명대사입니다.
 
처음 메가폰을 쥔 제가 형님과 함께한 건 큰 영광이었습니다. 여주인공 경아는 처음부터 신인 배우를, 남주인공 문호는 중량급 배우를 생각했거든요. 당시 형님은 절정기였습니다. 최고로 무르익었을 때였습니다. 지금 돌아봐도 최적의 캐스팅이었습니다.
 
그보다 먼저 저는 형님의 소탈한 성품이 떠오릅니다. 형님은 제 연출부 시절부터 늘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스타들과 달리 스태프·조감독들을 친근하게 대했습니다. 대스타임에도 아랫사람들이 소외감이 들지 않게 배려했습니다. 제가 감독이 된 후에는 형님의 남다른 독서량에 놀랐습니다. 당시 화제가 된 책은 모두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타고 다닌 차에도 항상 신간이 놓여 있을 정도였죠. ‘별들의 고향’을 찍을 때는 늘 원작을 들고 있었고. 일본 카메라잡지를 들고 다니며 촬영기사에게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미술 등 예술에 대한 조예도 깊었습니다.
 
지난달 4일 제23회 부산영화제 개막식에서 형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그게 마지막 인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팔순의 형님은 그때까지도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병으로 몸이 말랐는데. 몇 개월 시간을 주면 몸을 보기 좋게 만들어 영화에 출연하겠다”며 의욕을 다졌습니다. 형님이 주연을 맡고 제게 감독을 제의했습니다. 우리 시대 가족·노인문제를 다룬 영화였죠. 캐서린 헵번·헨리 폰다 주연의 ‘황금연못’(1981)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급변하는 한국사회에서 사진작가 가족 3대의 갈등을 다루겠다고 했습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 제목까지 정하셨고요. 첫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제가 형님이 투병 중인 전남 화순의 요양병원에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일전에 형님의 폐암 투병을 듣고 어느 정도 이별을 각오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떠날 줄 몰랐습니다. 내년 봄에 새 영화를 크랭크인 하자던 그 약속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배우 신성일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형님은 명실공히, 자타공인 한국영화사 자체이고, 별 중의 별이었습니다. 60~70년대 형님과 형수님(엄앵란)의 영화를 보지 않고 자란 청춘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쉬움이 너무 큽니다. 무엇보다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떠난 형님이 안타깝습니다. 좀더 오래 살아계셔서 저와 지난 시간을 가슴을 터놓고 얘기했으면 했는데, 이제와 보니 후회가 막급합니다. 늘 자신감 넘쳤던 형님에게 죽음이란 단어를 감히 꺼낼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장호

이장호

성일이 형님-. 누구나 그렇듯 형님에게 영광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많은 실수와 역경이 있었습니다. 가정생활에 굴곡이 심했고 정치인생도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주변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삶의 끝까지 붙들고 온 형님의 영화인생, 그 자체는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한국영화의 큰 별은 결코 지지 않을 겁니다. 내일(5일) 서울에 돌아가면 바로 빈소로 찾아뵙겠습니다. 지난 40여 년의 인연과 보살핌, 정말 고맙습니다. 부디 저 세계에서 영원의 안식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영화감독 이장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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