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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딴따라 아니다" 마지막까지 영화처럼 살다간 신성일

영화배우 신성일(81)이 4일 오전 2시30분 폐암으로 숨을 거뒀다.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치료에 전념해왔다. 지난달 열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며 최근까지도 대외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당시 이장호 감독, 배우 손숙과 더불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레드카펫을 밟아 이목을 끌었다.
 배우 신성일이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뉴스1]

배우 신성일이 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뉴스1]

 
그는 지난해 부산에서 취재진과 만나 “나는 ‘딴따라’ 소리가 제일 싫다. 딴따라 소리 들으려고 영화계에 뛰어든 것이 아니다. 영화를 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고, 종합예술 속의 한가운데 있는 영화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투병 이후 ‘인생 2막’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밝혔었다. 그는 “막장드라마 대신 따뜻하고 애정 넘치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 영화 ‘행복’이라는 작품을 기획 중이며, 김홍신 소설 ‘바람으로 그린 그림’도 영화로 옮길 계획”이라고 했다.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경북도청 공무원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릴 적부터 걸출한 용모에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대구 수창초등학교, 영덕중을 거쳐 명문 경북고에 합격했다. 서울대 진학이 목표였으나 2학년 때 꿈을 접어야 했다. 어머니가 운영하던 계가 깨지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빚쟁이들을 피해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서울대 상대에 원서를 넣었으나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던 환경 때문에 떨어졌다.  
 
방황하던 신성일은 청계천에서 두세 달 호떡 장사를 했다. 재수하던 중 우연히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가고, 1957년 신상옥(1926~2006) 감독이 운영하던 '신필름' 배우 모집에서 높은 경쟁률을 뚫고 전속배우가 됐다. 그때 신 감독으로부터 '뉴스타 넘버 원'이란 뜻의 '신성일(申星一)'이란 예명을 받게 된다. 성은 신 감독의 성씨를 따랐다.  
로맨스 빠빠/신성일신성일 - 맨발의 청춘신성일-창공에 산다신성일-아낌없이 주련다이만희 감독, 신성일 주연의 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 소설가 선우휘의 작품을 스크린에 옮겼다. 신성일(왼쪽)은 이 영화를 찍으면서 선우휘와 백기완을 직접 만나게 됐다. [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신성일-폭로신성일-아네모네 마담신성일-선거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다. 단역과 조연을 모두 거친 뒤 총 영화 507편을 주연, 한국 영화 발전에 공헌했다.  
 
1960∼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톱스타였다. 1966년에는 한 해동안 89편의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다. 상대역으로 출연한 여배우만 118명에 달한다.  
 
주요 출연작은 ‘아낌없이 주련다’(1962) ‘가정교사’(1963) ‘청춘교실’(1963) ‘떠날 때는 말없이’(1964) ‘맨발의 청춘’(1964) ‘초우’(1966) ‘별들의 고향’(1974) ‘달빛 사냥꾼’(1987) ‘위기의 여자’(1987) ‘레테의 연가’(1987) ‘아메리카 아메리카 아메리카’(1988) ‘증발’(1994) 등이다.
 
영화 제작에도 참여했고,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제작·감독을 맡은 작품은 ‘연애교실’(1971) ‘어느 사랑의 이야기’(1971)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1971)이다. 감독한 영화는 ‘그건 너’(1974), 제작작은 ‘코리안 커넥션’(1990) ‘남자시장’(1990) ‘물위를 걷는 여자’(1990)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 ‘열아홉 절망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1991) ‘안개 속에서 2분 더’(1995)다.
 
원래 이름은 강신영,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1981년 11대 총선 서울 용산·마포구에 한국국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2위로 낙선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대구 동구 갑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2000년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동구에서 당선돼 의정 활동을 했다. 17대 총선에는 정당 공천을 받지 못해 불출마했다.
 
청룡영화상 인기상(1963~1973), 아시아 영화제 남우조연상(1979),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1968),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1986),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1990),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1994), 대종상영화제 영화발전공로상(2004), 제28회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특별공로예술가상(2008), 2008년 제17회 부일영화상 영화발전공로상(2008) 등을 수상했다.  
 
1979년 한국배우협회 회장, 2001년 한국영화배우협회 초대 이사장 등을 지냈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이사장, 계명대학교 특임교수도 역임했다.
 
데뷔작 ‘로맨스 빠빠’에서 처음 만난 배우 엄앵란(82)과 1964년 결혼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두 사람의 결혼식에는 하객과 시민 4000여명이 몰려 큰 화제를 모았다. 초청장이 엄청난 가격에 암거래되는가 하면 결혼식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호텔 측에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다. 이 결혼식은 지금까지도 ‘세기의 결혼식’으로 회자되고 있다.
 
영화계에서는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영화인장을 치르는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으로는 부인 엄앵란 여사, 아들 강석현(51)씨, 딸 강경아(53)·수화(48)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배재성 기자 hongdoy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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