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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기 심장박동 들은 날, 잔혹한 전쟁을 떠올리다

기자
전새벽 사진 전새벽
[더,오래] 전새벽의 시집 읽기(20)
지금부터 별 것 아닌 얘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육아선배들에게는 이미 지나간 일이라 감흥 없을 얘기, 미혼들에게는 먼 일이라 감흥 없을 얘기, 필자를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남의 얘기이므로 감흥이 없는 얘기-지난 주말 산부인과에서 처음으로 태아의 심장소리를 들었다는 얘기 말이다.
 
17주 태아의 손. 지난 주말 산부인과에서 처음으로 태아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내용과 연관 없는 사진) [중앙포토]

17주 태아의 손. 지난 주말 산부인과에서 처음으로 태아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내용과 연관 없는 사진) [중앙포토]

 
아내는 태아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울었다. 나는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서 선물로 준 아기용 양말 한 켤레를 들고.
 
집으로 와서 신문을 펼쳤다. 국제정세 공부 좀 할 겸 읽기 시작한 영어 신문이었다. 1면을 장식한 건 어린 아기의 사진. 아기의 뱃가죽은 말 그대로 등가죽에 달라 붙어 있었다. 나는 병원에서 받아온 아기 양말을 내려놓고, 기사 속으로 들어갔다.
 
독자 여러분 가운데 예멘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나처럼, 예멘이 대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모르는 분들도 계실 거다. 지구본에서 대한민국을 찾아 손가락으로 찍고, 손가락은 그대로 둔 채 지구본을 천천히 오른쪽으로 돌려보자.
 
손가락의 위치는 서해를 지나면 바로 중국이다. 넓은 중국 땅을 한참 지나면 인도 잠깐, 파키스탄 잠깐, 아프가니스탄 잠깐 머물고 이라크에 도착한다. 거기서 손가락 한 마디 아래, 예멘이 있다. 한국으로부터 거리는 무려, 8,058킬로미터.
 
이토록 먼 땅 예멘에는 한국과 비슷한 점이 있다. 오래 전 남과 북으로 나뉘어 끊임없이 충돌해왔다는 점 말이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예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잔혹한 전쟁을 치르는 중이라는 것.
 
시아파 후티 반군이 장악한 예멘의 수도 사나가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수니파 연합군의 폭격을 받은 모습. 2015년 시작된 예멘 내전은 후티 반군의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에 대한 탄도미사일 공격으로 확대되고 있다. [AP=연합뉴스]

시아파 후티 반군이 장악한 예멘의 수도 사나가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수니파 연합군의 폭격을 받은 모습. 2015년 시작된 예멘 내전은 후티 반군의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에 대한 탄도미사일 공격으로 확대되고 있다. [AP=연합뉴스]

 
북예멘에는 후티(Houthis)가 이끄는 반군이 있다. 후티의 손아귀에 무려 80퍼센트의 예멘 국민이 들어가 있다. 남쪽에 주둔한 정부군과 연합군은 북예멘을 고립시키기 위해 도로를 봉쇄하고 돈의 흐름을 차단했다. 그 결과, 북예멘 사람들은 기아로 죽어 나가고 있다는 게 내가 읽은 기사의 골자였다.
 
문제는, 그들이 민간인이라는 것. 결혼식 당일, 신부의 머리 위로 포탄이 떨어지고 영양실조로 구토하는 아들을 기름값이 없어 병원에 데려가지 못하는 곳, 이것이 예멘의 지금이라는 얘기였다.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는 필자, 그 끔찍함을 감히 헤아리기 어렵다. 그런데 어디서 읽은 시 한 편 문득 떠오른다. 잊기 어려운 구절을 가진 전쟁 시다.
 
가을이 와도 가을이 아니었다.
숯검정이가 자욱한 하늘, 그 하늘엔 어느 구석에도
탐스런 목걸이로 걸리는 여문 머루알의 가지가 없었다.
산도 산이 아니었다. 치솟은 숯검정이의 더미 그것이었다.
더러는 시뻘겋게 타는 산이 있었으나 그것은 단풍이 아니었다.
 
총탄이요 포탄이요 폭탄이었다.
그해 6월부터는 짜도 짜도 피먹은 걸레였다.
 
재가 내렸다.
하늘에서는 재가 내렸다.
재는 집을 덮고 길을 덮고 어린 아기 어머니의 젖꼭지도 덮고
또 그 아기의 고사리 같은 손도 덮었다.
어찌하라 동서남북의 지평은 죄다 폭탄이었다.
재만 내렸다.
총탄이요 포탄이요 폭탄이었다.
이듬해 6월 또한 짜도 짜도 피먹은 걸레였다.
 
-전봉건, 「흙에 의한 시 3편 중 2」 부분
 
부분만 가져오긴 했지만, 시가 거의 서술형이다. ‘하늘에서는 재가 내렸다’처럼 단순한 사실들이 나열되고 있다. 평이한 산문으로 남을 뻔한 이 글을 끝내 시로 만드는 것은, ‘총탄이요 포탄이요 폭탄이었다’와, ‘짜도 짜도 피먹은 걸레였다’라는 행들이다.
 
시인 전봉건. 참전 체험을 바탕으로 전쟁에 관한 많은 시를 남겼다. [중앙포토]

시인 전봉건. 참전 체험을 바탕으로 전쟁에 관한 많은 시를 남겼다. [중앙포토]

 
참전 체험을 바탕으로 전쟁에 관한 많은 시를 남긴 전봉건의 이 작품은 6.25의 참상을 고발한다. 전쟁이 발발한 첫 6월부터 주변은 온통 짜도 짜도 피먹은 걸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듬해 6월에도 역시 짜도 짜도 피먹은 걸레다.
 
‘피먹은 걸레’라는 끔찍한 표현으로 독자 여러분의 심신을 지치게 하여 송구스럽다. 그러나 존 버거가 얘기했듯이 ‘시의 일은 부상당한 이를 돌보는 것’이므로, 감히 시 소개를 맡은 나의 역할은 그런 것이다. 다만 지금부터는 ‘피먹은 걸레’라는 말을 ‘그것’으로 대체하겠다.
 
필자가 몸담은 회사, 어떤 사업을 추진할 때 이런 기준을 적용한다. ‘리스크(위험)의 범위가 예상되면 사업 검토, 무제한 리스크면 검토 불가.’ 쉽게 말해 일이 잘못되더라도, 까먹을 돈이 얼만지 예상되면 해볼 만 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돈이 무한정 빠져나갈 수 있다면 당연히 그 사업은 검토할 수 없다. ‘무제한’이라는 게 그토록 무섭다.
 
프랑스의 사상가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1962)는, ‘전쟁이란 제한 없는 폭력’이라고 했다.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에서 포탄을 맞는 시민들을 보니 정말 제한 따위는 없는 모양이다. 전쟁이 계속되는 한 예멘은 그럴 것이다. 짜도 짜도 ‘그것’일 것이다. 모든 싸움이 지금 멈춰야 한다.
 
참상의 현장으로부터 8,058킬로미터 떨어진 따뜻한 거실에 앉아 있는 내게는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하지만 펜을 잡은 사람의 입장에서 고립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고, 아빠 될 입장에서 굶어 죽는 아이들의 지금을 외면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남의 시를 가져와 겨우 말한다. 지금 이 순간, 짜도 짜도 ‘그것’뿐인 일상을 견뎌내는 이들이 있다고, 무제한의 위험에 노출된 사람들이 있다고.
 
전새벽 회사원·작가 jeonjunh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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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