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심상복 연애소설> "난 어려운 여자야, 제멋대로고 괴팍하고"

기자
심상복 사진 심상복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6화 

"군대생활은 어디서 했어?"
 
"춘천에 있는 102보충대에서 방위병으로 근무했습니다."
 
"방위? 신체가 매우 준수해 보이는데, 무슨 사유로?"
 
"그럴만한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습니다."
 
"병장이 묻는데, 대답을 거절하시겠다...."
 
첫 데이트에서,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홀어머니와 외아들 얘기를 털어놓을 정도로 나는 더 이상 어리석지 않았다.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라 했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누나는 어디서 복무했습니까?"
 
"복무? 하하하"
 
누나는 꽤나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여군이라도 다녀온 것 같아?"
 
"말투나 용어가 너무 군대스럽습니다."


하기 싫은 섹스?
".......하긴 나도 나름대로 복무했지......귀한 집안의 자제분을 위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하기 싫은 섹스 하면서..."
 
술의 힘 또는 부작용일 테다. 그녀의 대화가 갑자기 몇 단계나 뛰어버렸다. 내가 공포탄으로 공격한 거라면 그녀의 반격은 기관총급이었다. 나는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
 
"어이, 김이병, 왜 그래? 완전히 얼음이 되었네. ㅎㅎㅎ"
 
".........."
 
그녀는 얼빠진 내 모습에 재미있어 했다.
"이제 보니 아주 순진한 총각이구먼. 자, 술이나 한잔 하자구."
 
나는 멍한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잔을 내밀었다.
 
"정신 차려! 이건 술이 아니라 정신 차릴 때 먹는 약이야!"
 
두 잔을 연달아 마시고 나니 아닌 게 아니라 정신이 좀 돌아왔다. 나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났다.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면서 취하면 안 된다고 다짐했다.
-나 그렇게 순진한 놈 아닌데, 왜 이러지...
 
무방비 상태에서 급소를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가장 궁금해 했던 대목을 그녀는 알콜의 힘을 빌려 순식간에 터치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혹시 의도했던 건 아닐까. 자신도 하기 힘든 얘기를 슬쩍 흘려버림으로써 쌍방이 모두 그 숙제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덕분에 괜히 쓸 데 없이 신경전 벌이면서 시간낭비할 일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어쩌면 지금껏 내가 알던 그녀와 맨정신에서 이렇게 높은 수준의 대화에 도달하려면 족히 몇 달은 더 걸렸을지도 모른다. 첫 미팅에서 베를린장벽 같은 거대한 장애물이 무너졌으니 실용주의자인 나의 입장에선 기실 나쁘지 않았다. 대충 그 정도로 마음을 정리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제 정신입니다!
"어이, 김이병, 오바이트 하고 왔어?"
 
"아닙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세수만 했습니다."
 
"지금 제 정신 맞습니까? 술 한 잔 더 할 수 있습니까?"
 
"네,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전방을 향해 '나는 제 정신입니다' 구호 세 번 복창합니다."
진짜 꼴통 장병장이었다.
 
"........."
 
"병장의 명령을 거부하는 겁니까?"
 
"누나, 이건 좀 너무하지 않아요?"
 
나는 버티다 못해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구호를 외쳤다. 작지만 또렷하게.
"나는 제 정신입니다. 누나를 좋아합니다. 누나를 좋아합니다. 누나를 좋아합니다."
 
"햐, 이 친구 제법 기지도 있는데...."
그러면서 술 한 잔 따라 주었다.
 
"술 한잔 얻어먹기 정말 힘듭니다."
 
"세상이 본래 힘든 거야. 넌 아직 어려서 세상을 모르지. 정말 힘든 게 삶이라고."
 
"말도 안 됩니다. 누나 같이 우아하고 지적이고 예쁘고 벤츠 타는 여자가 무슨 세상이 힘들다고 그러세요? 그리고 도대체 몇 살인데 저한테 그렇게 반말을 하십니까?"
 
"야, 이등병, 넌 입은 있지만 말할 자유는 없어, 인마. 이게 아직도 인간인 줄 착각하고 있네. 넌 인간이 아니라 그냥 방위병이야, 방위병!"
 
그 순간 나는 그녀가 정말 군대를 다녀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네 알겠습니다. 저는 인간도 아닙니다. 병장님의 시종일 뿐입니다. 제겐 세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도 시종, 둘도 시종, 셋도 병장님의 시종이 되고 싶습니다."
 
역할극 1막을 끝낸 뒤 우리는 다시 낄낄거리며 웃을 수 있었다. 술의 힘 때문인지 그녀의 마음 속 응어리가 뭔지 몰라도 조금은 풀린 듯 보였다.


젊은 시절 아버지와 너무 닮았어요
"너 날 좋아한다고? 그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매우 어려운 문제야. 거의 불가능한...."
 
"내가 좋아한다고요. 내가요!"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왜 좋아하는데?"
 
"똑똑한 누나인줄 알았는데.....좋아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네가 첫 편지에 썼듯이 예쁘고 우아해 보여서? 하지만 이미 네가 알고 있듯이 난 난이도 최상급의 여자야. 제멋대로고 성격도 괴팍하고...날 쫓아다닌 남자들이 꽤 있었지만 다 스스로 물러났어. 심지어 내 남편까지도...."
 
".........."
 
"그러니 날 좋아하면 안 돼. 상처를 입는 쪽은 결국 그쪽이니까."
 
"상처요? 어떤 상처요?"
 
"그만두자고. 오늘은 그만하자고. 이미 너무 많이 마셔버렸어."
 
그녀의 표정이 빠르게 식어갔다. 말수도 비례해서 줄어들었다. 식탁에는 마지막 병이 외로이 서 있고 남은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오늘 좀 많이 드셨죠?”
 
“……”
 
“술 잘 못 드시면서 잘 먹는 척 하신 거죠?”
 
“……”
 
실어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보이던 그녀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버지 젊었을 때와 너무 닮았어요." (계속)
 
관련기사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다른 기자들의 연재 기사 보기

뉴스레터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