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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영화 만들다 대포폰 공급책 전락한 어느 영화제작자

2012년 9월 영화제작사를 설립한 A씨(44). 2014년과 2016년 2편의 영화를 제작하며 나름 인지도를 쌓아가던 그는 '보이스피싱'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보이스피싱 조직에 피해를 본 남성이 이들을 역추적해 복수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직접 시놉시스(영화나 드라마의 간단한 줄거리나 개요)를 쓰는 등 시나리오 작업에 공을 들였다. 
경기남부경찰청 [연합뉴스]

경기남부경찰청 [연합뉴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경찰과 금감원, 전직 국내 범행 조직원 인터뷰 만으로는 보이스피싱 범행 수법 등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A씨는 보이스피싱 조직을 직접 만나기로 했다. 2012년부터 6차례 중국을 오가며 보이스피싱 조직 7곳과 접촉하고 인터뷰했다.  
그러던 2016년 한 보이스피싱 조직에서 은밀한 제안을 받았다. 
"(대출 전화 등을 하는) 콜센터에서 사용할 전화기(대포폰)를 중국으로 보내주면 한 대당 250만원~400만원에 사겠다"는 제안이었다.
규모가 작은 영화사라 투자자가 없으면 영화 제작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A씨는 고민을 하다가 영화 자금을 모을 생각으로 이들의 제안을 수락했다.   
 
보이스피싱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중국 조직원들과 접촉을 하다 범행에 가담한 영화제작자가 경찰에 붙잡혔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1일 사기 및 전기통신사업법 위반 등 혐의로 국내 총책 A씨 등 4명을 구속하고 이들의 범행을 돕거나 유령법인 명의를 제공(공정증서원본 등 부실기재)한 12명 등 16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범죄흐름도 [사진 경기남부지방경찰청]

범죄흐름도 [사진 경기남부지방경찰청]

 
A씨 등은 지난해 6월부터 지난달까지 대출을 희망하는 이들의 명의로 유령 법인·사업자 33개를 개설한 뒤 이를 이용해 860개의 대포폰(대포 전화번호) 등을 만들어 중국 조직에 공급한 혐의를 받고 있다. 범행으로 A씨 등이 벌어들인 수익만 10억원에 이른다.
 
중국 보이스피싱 조직의 제안을 받은 A씨는 한국으로 돌아와 영화사 직원 B씨(35·구속)와 범행을 모의했다. 
이들은 수월한 범행을 위해 보이스피싱 범죄로 구속된 전력이 있는 C씨(33)를 영입했다. C씨는 "유령법인을 만들면 대량으로 전화기(전화번호)를 개통할 수 있다"는 고급정보(?)를 알려줬다.
이후 A씨는 자신의 지인들을 끌어들여 콜센터 상담원, 상담팀장, 현장 실장 등으로 업무를 분담해 본격적인 범행에 나섰다.
경찰이 보이스피싱 조직에게 압수한 물품들 [사진 경기남부지방경찰청]

경찰이 보이스피싱 조직에게 압수한 물품들 [사진 경기남부지방경찰청]

 
보이스피싱 조직이 보낸 대출 희망자 모집 문자 메시지 [사진 경기남부지방경찰청]

보이스피싱 조직이 보낸 대출 희망자 모집 문자 메시지 [사진 경기남부지방경찰청]

금융기관을 사칭해 대출광고 문자를 무더기로 발송한 뒤 이를 보고 연락한 이들에게 콜센터 직원이 상담한다며 '인적사항, 연락처, 주소 등 개인정보를 파악해 상담팀장에게 전달했다.
상담팀장은 대출희망자들과 접촉해 법인 개설서류를 준비하도록 권했고 현장 실장 등이 이들을 데리고 법원 등기소와 세무서 등을 방문해 유령법인·사업자를 만들었다.
 
이들은 한 법인이나 사업자에서 여러 전화번호를 개설하는 것에 대한 통신사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책상·컴퓨터 등을 설치한 위장 사무실을 만들기도 했다. A씨 등은 국내에서 '070'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보다 '1577'이나 '1566'으로 시작하는 8자리 '전국대표번호'가 좀 더 신뢰성 있다고 판단하고 발신 번호 변경까지 했다. '070' 번호 5개로 발신할 때 수신자에게는 8자리 대표번호 1개가 찍히도록 세트로 묶어, 세트당 300만원씩 중국 조직에 넘겼는데 유령 법인 1개로 10개의 세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주거지 압수 현장에서 수거한 대포폰 [사진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주거지 압수 현장에서 수거한 대포폰 [사진 경기남부지방경찰청]

경찰이 보이스피싱 조직에게 압수한 물품들 [사진 경기남부지방경찰청]

경찰이 보이스피싱 조직에게 압수한 물품들 [사진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이런 식으로 대포폰을 만든 A씨는 인천항과 평택항 등을 오가는 소무역상을 이용해 중국 조직에 넘겨 10억원을 챙겼다. 
이 과정에서 경찰 추적을 피하기 위해 2∼3주 주기로 대포폰을 바꿔 사용하고, 전화기를 소무역상들에게 보낼 때는 퀵서비스를 이용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조직원 간에도 '이 실장', '정 부장' 등의 가명을 사용해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기도 했다.
반면 이들에게 대출을 받을 목적으로 개인정보를 넘겨 준 12명은 정작 대출은 받지도 못하고 처벌은 물론 배상까지 해야 할 위기에 놓였다.  
경찰은 이들이 중국 보이스피싱 조직에 전달한 전화번호로 국내에서 135명이 10억원 상당의 피해를 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주거지 압수 현장에서 발견한 상담 시나리오 [사진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주거지 압수 현장에서 발견한 상담 시나리오 [사진 경기남부지방경찰청]

경찰이 보이스피싱 조직에게 압수한 물품들 [사진 경기남부지방경찰청]

경찰이 보이스피싱 조직에게 압수한 물품들 [사진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치밀함을 보이던 이들의 범행은 올해 초 보이스피싱 범죄 수사 중 특정 번호가 유령법인 명의로 개설된 사실에 착안한 경찰이 수사에 나서면서 발각됐다.
A씨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취재를 하다가 영화 제작비를 벌려고 가담을 했다. 피해자들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현재 (범행을 소재로 한) 시나리오가 완성된 상태다. 절대 다른 곳에 유출되면 안 된다. 꼭 보안을 유지해달라"는 뻔뻔함을 보였다.
실제로 A씨가 쓴 시나리오는 내년도 촬영을 목표로 각색까지 진행이 됐고 주연배우와 감독까지 섭외가 완료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유령법인 개설과 전화기 개통 과정에 제도적인 허점이 있어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고 보고 관련 기관에 제도개선 사항을 전달할 방침"이라며 "A씨가 붙잡히는 날까지도 수도권 다른 지역에 위장 사무실을 만드는 등 범행을 확대하려고 했던 만큼 피해자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원=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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