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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화공과 '천재', 유학간 미국서 물리학 택한 이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소립자 물리학자인 이휘소 박사(왼쪽에서 둘째)가 미국의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NAL)에서 동료들과 함께 연구할 당시의 모습. [사진 페르미 연구소]

소립자 물리학자인 이휘소 박사(왼쪽에서 둘째)가 미국의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NAL)에서 동료들과 함께 연구할 당시의 모습. [사진 페르미 연구소]

프린스턴 시절은 내가 과학자로서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학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사람이다. 나는 미국 과학 연구의 심장부인 그곳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고 교류하며 인간사에 대해 많이 배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잊을 수 없는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고교 선배인 이휘소(1935~77년) 박사다. 이 박사는 내 형과 경기고 동기동창이자 가까운 친구였다. 서울 공대 화학공학과 재학 시절부터 워낙 ‘천재’로 유명해서 익히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정근모, 과학기술이 밥이다 - 제131화(7573)
<25>이휘소, 자나깨나 고국 생각
화공과 다니다 물리학에 매료돼
전과 거부되자 미국 가서 전공
다니는 대학마다 과학자 두각
유펜 박사 마친 직후 교수 임용
형 친구로 대학 시절 '천재' 명성
프린스턴 학술 세미나에서 재회

이 박사는 1947년 경기중에 입학했으며 6·25전쟁으로 부산에서 피난학교에 다니다 대학입학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52년 부산 대신동의 전시연합대학에 속해있던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서울로 돌아와 수업을 받으면서 물리학에 흥미를 느껴 물리학과로 전과를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마침 한국전 참전 미군장교부인회의 장학생에 뽑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비로소 물리학을 맘껏 공부할 수 있게 됐다.
미국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그는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55년 1월 미국 오하이오주의 주립대인 마이애미대 물리학과에 편입해 1년 6개월 만인 56년 6월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물리학과 학과장의 추천으로 피츠버그대 석사과정에 들어가 58년에 마쳤다. 피츠버그대에선 원자핵 이론을 강의하던 시드니 메슈코프 교수가 추천해 아이비리그 대학인 펜실베이니아대(유펜) 박사과정에 진학해 61년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활동한 한국인 소힙자 물리학자인 이휘소 박사. [사진 중앙포토]

미국에서 활동한 한국인 소힙자 물리학자인 이휘소 박사. [사진 중앙포토]

이 박사는 펜실베이니아대의 에이브러햄 클라인 교수와 공동으로 연구하며 박사 논문을 마치자마자 파격적으로 이 대학 교수가 됐다. 1년 동안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연구하다 펜실베이니아대로 돌아갔지만, 고등연구소의 목요 학술 세미나에는 자주 참석해 만날 수 있었다. 나는 프린스턴 플라스마 물리학 연구소(PPPL)에서 핵융합을 연구하면서 이 세미나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면서 이 박사를 만날 수 있었다. 펜실베이니아대가 있는 필라델피아에서 프린스턴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 30분 정도 거리였으니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이 박사는 62년 영어 이름이 마리안인 말레이시아계 화교 출신 심문칭(沈曼菁)과 결혼해 아들 제프리와 딸 아이린을 두었다. 이 박사의 어머니인 박순희 여사는 서울 종암동에서자애의원을 운영하던 의사였는데 아들을 만나러 가끔 미국에 오면 우리 집을 찾아 함께 식사하곤 했다. 아들 친구의 동생 집이고 당시 미국에는 한국인 가정도 많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우리 집을 찾으셨다. 그런데 그분의 중국계 며느리는 김치 냄새에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김치가 세계인의 인기 식품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이 박사의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우리 집에 찾아와 내 처가 해주는 한식을 참으로 맛있게 드셨다. 당시 식사하시면서 흡족해하던그분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 박사와의 좋은 인연이다.  
한국인 소립자 물리학자인 이휘소 박사의 모습. [사진 페르미 연구소]

한국인 소립자 물리학자인 이휘소 박사의 모습. [사진 페르미 연구소]

이 박사는 68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지만, 한국인임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과학자로서 고국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 71년 한국에서 한국과학원 부원장으로 있던 나는 이 박사와 연락이 닿았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황수연 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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