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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에 "내게 양보하라"는 할머니···평양 악단공연 티켓전쟁

악단공연으로 본 김정은의 음악 정치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공연장에선 인기 가수를 향한 ‘팬클럽’의 싸인 요구가 쏟아진다. 문자메시지 등으로 팬심을 전하기도 한다. 서방국가가 아닌 평양에서 요즘 벌어지는 일이다. 모란봉악단을 비롯한 북한의 대표적 음악단 공연에 주민의 폭발적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공연 레퍼토리와 가수까지 직접 챙기고, 전용 극장을 지어주는 등 관심을 쏟고 있다. 북한 악단공연을 정밀 분석한 책 『김정은의 음악 정치-모란봉악단 김정은을 말하다』를 지난주 펴낸 강동완 동아대 교수와 함께 평양에 불고 있는 악단공연 바람을 진단해 봤다.
  
모란봉악단 공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한 평양 서성구역 김정희 할머니는 이른 아침 집을 나섰다. 지구보급소로 달려가 공연 티켓을 구할 심산이었다. 평양산원 유선종양연구소에 다니는 며느리 관람표까지 구할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현장에 도착해보니 먼저 와있는 사람이 수 십명이 됐다. 김 할머니는 보급원에게 “늙은이가 언제 또 이런 희한한 공연을 보겠나. 이왕이면 앞좌석의 관람표로 달라”고 사정했다.하지만 돌아온 답은 “미안합니다. 앞좌석  관람표는 이미 다 나갔습니다”라는 얘기였다. 겨우 두 장을 구해 집에 돌아오니 5명이 가족이 저마다 성화였다. 그 가운데서도 대학에 다니는 손녀의 떼질이 보통이 아니었다. 손녀를 위한 일이라면 늘 극성이던 김 할머니도 이번만은 양보하지 않았다. “앞길이 구 만리 같은 너희들이야 훗날에도 기회가 있을 터이니, 이번만은 일흔 넘은 이 늙은이가 먼저 가자꾸나”라는 김 할머니의 말에 가족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북한 관영매체들이 전한 이런 에피소드는 북한에 불어닥친 악단공연 관람 붐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특히 간판격인 모란봉악단 공연 열풍은 티켓 구하기에서부터 드러난다. 워낙 인기가 높다 보니 그야말로 전쟁판 같은 데다, 가족 안에서까지 치열한 눈치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국가예술공연운영국으로 공연 관람과 관련한 전화가 이어지고, 각 지구보급소 주변은 관람표를  사러 오는 사람들로 이른 새벽부터 흥성인다고 한다.
 
인기 비결은 과거와 확 달라진 선곡과 무대 장치, 그리고 가수 면면이다. 김씨 3부자 찬양과 체제선전을 위주로 하던 데서 벗어나 서정적 요소를 일부 가미한 노래가 등장했다. 레이저 조명과 영상을 활용하는 등 시각적 변화도 시도했다. 현대적인 해외 유명 전자악기도 대폭 도입했다. 지난 2012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북한이 사치품 도입에 쓴 돈이 40억429만 달러인데, 악기가 1235만 달러(140억7000만원 상당)를 차지(국회 외교통일위 소속 자유한국당 윤상현 의원실 국감자료)할 정도다. 김일성 시기 보천보전자악단이나 김정일 집권 때의 은하수관현악단에선 보기 힘들었던 모습이다. 미모의 여성 가수를 내세워 이름을 알리는 전략도 주효했다. 강동완 교수는 “2012년 7월 첫 공연 이후 공연 내용과 무대 형식 등이 점점 화려해지는 추세”라고 말했다.간판급 가수인 라유미와 류진아가 서로 경쟁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고, 베테랑 연주자인 선후향희의 빼어난 기량 등이 관객에게 볼거리와 흥미를 불러일으킨다는 얘기다. 강 교수는 지난해 말까지 이뤄진 모란봉악단의 공개 공연 31차례를 모두 분석한 연구 결과를 책으로 펴냈다.
 
이에 따르면 음악단에 대한 김정은 위원장의 각별한 관심은 집권 초반부터 나타났다.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으로 권력을 거머쥔 김정은은 모란봉악단을 출범시켰다. 부인 이설주를 세상에 처음 알린 곳도 이 악단 창단 공연자리다. ‘음악 정치’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이런 관심은 삼지연관현악단 창단으로 이어졌다. 기존의 삼지연악단과 청봉악단을 결합한 형태인 삼지연관현악단의 존재는 지난 2월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이뤄진 남한 방문 공연을 통해 확인됐다. 북한 주요 악단을 거치며 잔뼈가 굵은 가수 현송월은 삼지연관현악단의 단장을 맡아 공연을 이끌었다. 이 악단이 평창을 겨냥해 급하게 만들어졌다는 정황은 북한 매체의 보도를 통해 파악됐다. 지난 4월 김정은이 삼지연관현악단에 선물한 악기를 전달하는 행사에서 박광호 노동당 부위원장은 “갓 태어난 악단의 공연 준비 사업을 (김 위원장이) 이끌어줬다”고 밝혔다. 박 부위원장은 “김정은의 영도가 있어 삼지연관현악단은 온 남녘 땅을 들었다 놓을 수 있었다”고 말해 북측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짐작케 했다. 평양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지난 18일 저녁 평양대극장에서 이뤄진 환영 공연도 삼지연관현악단이 주도했고,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김정은 위원장 부부가 함께 관람했다.
 
삼지연관현악단을 위해 관현악 전용 공연장을 건립한 데서도 김정은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10일 마무리 공사 중인 현장을 방문해 “만점짜리 음악홀을 건설한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평양 보통강변에 자리한 이곳은 원래 서커스 공연이 이뤄지던 모란봉교예극장으로 쓰였다. 폐기되다시피 한 극장을 김정은이 지난 1월 “세계적 수준의 관현악단 전용극장으로 바꾸라”고 지시한 이후 리모델링이 이뤄졌다.
 
북한에 불고 있는 악단 열풍 앞에는 장애물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북한판 한류로 불리는 남한의 드라마·영화·음악 등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북·중 접경지역을 통한 유입과 함께 해외 방문이나 체류 경험을 한 엘리트 계층을 통한 반입이 늘고 있다고 한다. 한류 문화를 맛본 주민들은 식상한 북한의 TV 프로그램이나 악단공연으로부터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해 12월 제5차 당세포위원장 대회에서 “비사회주의적 현상과 섬멸전을 벌여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배경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우리 내부에 불건전하고 이색적인 사상 독소를 퍼트리고 비사회주의적 현상을 조장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고 외부세력을 비난한 것도 북한 주민의 눈과 귀를 파고드는 콘텐트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서구식 전자악기와 여성 가수를 내세운 김정은의 음악 정치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김정은 시대 들어 외부세계에 눈 떠가는 북한 체제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긍정적 분석이 제기된다. 체제선전 요소가 여전한 건 사실이지만 개혁·개방 가능성을 읽을 수 있고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얘기다. 하지만 폭압적 독재체제와 3대세습 등 북한 권력의 문제점을 가리기 위한 선전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 목소리도 높다. 강동완 교수는 “북한의 악단 정치를 연구하면서 김정은에게 있어 음악은 한 개인을 우상화하기 위한 선전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파악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정은의 음악 정치를 그대로 둔 채 그를 평화의 파트너로 미화해서는 안 될 것”이란 주장이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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