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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만 없는 여왕' 메르켈 퇴장···이젠 극우가 설친다

 3년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EPA=연합뉴스]

3년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EPA=연합뉴스]

  ‘왕관만 쓰지 않은 유럽의 여왕'. 
13년째 독일 총리를 맡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을 일컫는 말이다. 네 번째 총리 임기를 마치면 헬무트 콜 전 총리에 이어 독일 최장수 총리 반열에 오르는 그가 유럽의 정치 지형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그런 메르켈이 3년 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고 총리직도 네 번째 임기가 끝나는 2021년 9월까지만 하겠다고 했다. 기민당이 임기 전에 메르켈에게 퇴진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워싱턴포스트(WP)는 예상했다. 메르켈 시대가 끝나는 것이다.
최근 잇딴 지방선거에서 득표율 급락을 겪은 메르켈 총리 [EPA=연합뉴스]

최근 잇딴 지방선거에서 득표율 급락을 겪은 메르켈 총리 [EPA=연합뉴스]

 
 메르켈의 조기 퇴장 선언은 지지율 급락이 이유다. 중도우파 기독민주당의 대표를 18년째 맡고 있는 메르켈은 대연정으로 중도좌파 사회민주당(사민당)과 손잡고 좌파적 정책까지 수용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걸었다. 징병제 폐지, 원전 폐쇄 결정, 최저임금제 도입 등을 결정하며 꾸준한 경제성장과 정치적 안정기를 이끌었다.
 
 메르켈은 ‘자유 세계의 총리'로도 불렸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동진 야심에 맞서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 때 유럽을 단결시켜 러시아에 제재를 가했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통행식 외교에 대한 대응도 주도했다.
 
 하지만 2015년 난민 100만명가량을 받아들인 포용 정책이 그늘을 드리웠다. 유럽 곳곳에서 테러가 터지고 세계화의 부작용으로 독일 내에서도 지역 간 경제 상황에 격차가 벌어지자 불만이 터져 나왔다. 지난해 총선에서 기민당과 자매정당 기독사회당 연합의 득표율은 2013년 선거보다 8.6%포인트 하락했다. 그만큼의 표가 극우 독일을 위한 대안(AfD)으로 넘어갔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EPA=연합뉴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EPA=연합뉴스]

 
 기민당 내 보수파는 메르켈에게 우향우를 주문했지만, 메르켈은 따르지 않았다. 진보 성향 녹색당을 포함한 자메이카 연정을 추진했다. 그 연정이 무산되자 메르켈과 사민당은 대연정을 꾸려 극우 정당의 국정 참여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기민ㆍ기사연합과 사민당은 이후 더 깊은 굴곡에 빠져들었다. 최근 실시된 바이에른주 지방선거에서 기사당은 56년 만에 과반 확보에 실패했고, 헤센주 선거에서 기민당과 사민당은 각각 10%가량 득표율이 낮아져 수십 년 만에 최저치를 보였다. 정당 지지도 여론조사에서 현 집권 연정은 39% 수준에 그치고 있다. 총선이 실시되면 집권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극우 독일을 위한 정당 지지자들이 메르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극우 독일을 위한 정당 지지자들이 메르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사회가 보수화한다면 기민ㆍ기사당이 우향우 노선을 걸으면 될 것 같지만, 독일 상황은 간단치 않다. 기사당 대표인 호르스트 제호퍼 내무장관이 강경한 이민 정책을 요구하며 연정 내 갈등까지 일으켰지만 바이에른주 선거에서 기존 보수 지지자들은 극우 정당에 표를 줬다. 반면 젊은 층은 사민당 대신 이민에 관대한 녹색당 지지로 옮아갔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헝가리, 폴란드 등 다른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독일에서도 중도 좌·우파 기성 정당이 몰락하고 극우나 좌파 색채가 뚜렷한 정당이 부상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가디언은 메르켈의 공식 퇴임 이전부터 정치적 불안정과 혼란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기민ㆍ기사 연합이 과도하게 보수화의 길을 걸으면 사민당이 반발해 대연정에서 탈퇴할 가능성이 있다. 정부가 붕괴하고 새 총선이 치러지면서 메르켈의 퇴장은 빨라진다. 이럴 경우 새 총선 이후 좌파 성향인 녹색당과의 연정은 불가능하게 된다. 기민ㆍ기사연합이 연정을 꾸릴 방법은 극우인 AfD와 손잡는 수밖에 남지 않는다.
1991년 정치적 양부인 헬무트 콜 총리와 함께 앉아 있는 앙겔라 메르켈 [EPA=연합뉴스]

1991년 정치적 양부인 헬무트 콜 총리와 함께 앉아 있는 앙겔라 메르켈 [EPA=연합뉴스]

 
 오스트리아에선 실제로 중도 우파와 극우가 집권 연정을 꾸렸지만, 독일에서 현실화하면 여파가 크다. AfD는 유로화와 EU에 회의적일 뿐 아니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세계화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기민당 내 보수파와 극우의 결합은 서방 동맹 자체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유로존 최대 경제국의 정치적 혼란은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결과와 비슷한 충격이자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부채 위기 이후 독일이 주도해온 유럽의 긴축 정책도 느슨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 메르켈 주자들. 왼쪽부터 보수 강경파 옌스 슈판 보건부 장관, '미니 메르켈'로 불리는 안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우어 기민당 사무총장, 프리드리히 메르츠 변호사. [EPA=연합뉴스]

포스트 메르켈 주자들. 왼쪽부터 보수 강경파 옌스 슈판 보건부 장관, '미니 메르켈'로 불리는 안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우어 기민당 사무총장, 프리드리히 메르츠 변호사. [EPA=연합뉴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독일이 과거보다 국수주의로 기울 여지가 높다고 분석했다. 관건은 ‘포스트 메르켈'이 누구냐다.
 ‘미니 메르켈'로 불리는 기민당 온건파 안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우어(56) 기민당 사무총장이 총리직을 따낸다면 메르켈 노선은 명맥을 유지할 전망이다. 반면 메르켈을 비판해온 보수 강경파 옌스 슈판(38) 보건부 장관이 키를 쥐면 메르켈 시대는 진정한 종말을 고하면서 국수주의로 빠져들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메르켈 시대의 종언은 서방이 불확실성의 시대로 접어드는 전조가 되고 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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