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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수’의 마지막 장면과 어울리는

WITH 樂: 비에니아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2번
국도변에 달려 있는 붉은 감을 보다가 “익기 전에 곪지 말자”는 문장이 떠올랐다. 지난 주말 책장을 뒤적이다 10여 년 전 읽던 책 모서리에 적어 놓은 글은 본 것이다. 지나간 10년이 60초짜리 하이라이트 영상이 되어 지나갔다. 잘한 일보다는 못난 짓만 떠올랐다. 홍시가 되지 못하고 땡감이나 옆구리 터진 감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최소한 감 말랭이는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햇살도 고즈넉한 오후여서 흑백영화 같은 음악에 마음이 끌렸다. 헨릭 비에니아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이다. 같은 D단조의 시벨리우스 협주곡이 겨울의 삭풍 같다면, 비에니아프스키는 가을 바람을 닮았다. ‘바이올린의 시인’ 비에니아프스키는 어려서부터 주목받던 신동 바이올리니스트였고 뛰어난 작곡가였다. 연주자로서 그는 19세기 바이올린의 거장인 파가니니나 사라사테, 요아힘과 함께 거론되곤 한다. 그런 그가 남긴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한 곡이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이다.  
 
김봄소리의 데뷔 음반을 느지막이 들었다. 국내 바이올린계에서 대중 가수 ‘아이유’같은 존재다. 아저씨 팬들이 꽤 많다고 한다. 우선 이름이 한 번 들으면 기억된다.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같은 핵미사일 연구원급 이름보다 정감 가고 좋지 않은가.  
 
연주도 이름처럼 참신하다. 봄의 소리로 가을을 연주하는 듯하다. 첫 음반에서 그녀는 안전한 선택을 했다. 비에니아프스키의 협주곡과 더불어 쇼스타코비치의 협주곡 1번이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그녀가 콩쿠르에서 연주했던 곡이다. 첫 녹음이다 보니 새로운 도전보다는 익숙한 곡을 다듬자고 음반사가 제안했을 것이다. 신인 연주자가 뭔 힘이 있겠나. 일종의 비즈니스 관행을 따라갈 수밖에.  
 
하지만 나쁜 것만은 아니다. 프로 비즈니스맨들의 경험과 연주자의 잠재력이 결합하면 좋은 성과를 거두곤 한다. 그럼 이 음반은 어떨까. 두 개의 협주곡 중에서는 비에니아프스키 쪽이 조금 낫다. ‘비에니아프스키 음반은 내 인생에서 이거 딱 한 장이면 된다’고 한다면 잠시 함께 고민해 보자고는 말하고 싶다. 대신 우리 시대의 젊고 생동감 넘치는 연주를 원한다면 그리 망설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나는 1악장 도입부의 주제 선율을 들으면 비비안 리 주연의 1940년 영화 ‘애수’가 생각난다. 음반 설명에는 비에니아프스키가 도입한 오페라의 선율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라보엠’의 미미가 죽을 때도, 아이다가 죽을 때도 무덤덤했던지라 비비안 리의 슬픈 눈망울이 더 먼저 떠오르더라. 작곡가가 설령 그렇게 작곡했을지라도 그건 그 사람 사정이다. 사무치게 아름다운 느린 2악장은 안개비 내리는 ‘애수’의 마지막 장면과 꽤나 잘 어울린다. 무성 영화를 보듯 영화 속 모든 소리를 끄고 이 음악을 대신 틀어본다면 공감할 것이다.  
 
김봄소리의 연주를 공연장에서 들은 적이 있다. 그때는 브루흐 협주곡이었다. 작고 아담한 그녀가 당차게 연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날렵한 연주였으나 한 편으로는 음영이 깊지는 않아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만의 특징 같지는 않고 요즘 일반적 경향이라 크게 괘념치는 않았다. 비에니아프스키 녹음에서도 비슷한 아쉬움이 남긴 한다.  
 
그런데 잠깐!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겐가. 그녀는 겨우 20대 중후반이다. 프로연주자로서 출발선에 서 있다. 여기서 지나친 걸 요구하는 건 익기 전에 곪아 버린 아저씨들의 객쩍은 잔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막 연한 감잎을 틔운 김봄소리가 이 땅의 다른 젊은이들과 더불어 멋지게 성장하길 기대한다.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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