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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당선때도 돈가방? 美·사우디 추악한 밀월 73년

영화로운 세계
“미국인들은 남의 땅에 구멍 뚫길 좋아하지. 당신, 사우디 왕자들의 졸개잖아.”
“왕이 되고 싶다면 왕자님에게도 졸개가 필요할 겁니다.”
 
영화 '시리아나' 속 한 장면

영화 '시리아나' 속 한 장면

이 솔깃한 제안은 뭐지.  
 
화려한 파티장의 뒤편 어두운 방. 한 나라의 욕심 많은 둘째 왕자가 누군가와 거래 중입니다. 출중한 형 나시르 왕자에 비해 한참 부족한 그에게도 기회가 있는 걸까요?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이가 나타난 겁니다.  
이 의뭉스런 남자는 대체 누굴까…. 가상의 중동 산유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 ‘시리아나’는 진득하게 보는 이를 끌어당깁니다.
자말 카슈끄지 [AFP=연합뉴스]

자말 카슈끄지 [AFP=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에 비판적이었던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피살 사건으로 전 세계의 눈이 사우디로 향해 있습니다.
 
카슈끄지는 지난 2일 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 총영사관에 들어간 후 실종됐고,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그가 살해됐다고 23일 공식 발표했죠. 국제사회는 사우디의 실권을 쥐고 있는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가 연루됐을 것이라 보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빈살만은 강력히 부인, “극악무도한 범죄”라며 거리를 두고 있지만 어째 앞길이 순탄치 않아 보입니다.
 
주목해야 하는 건 미국의 반응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내내 사우디를 감쌌거든요. 일이 점점 악화하자 “역사상 최악의 은폐”라며 세게 비판하긴 했습니다만, 사우디에 무기 수출은 계속하겠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미국 언론들의 해석은 간단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사업가 시절부터 ‘큰손’ 사우디와 돈독했고, 현재도 미국의 무기를 어마어마하게 사주고 있기 때문에 사우디를 버릴 수 없단 거죠. 이란을 압박하려면 사우디가 꼭 필요하기도 하고요.  
 
그런데요, 과연 트럼프 대통령만 사우디와 이렇게 특별한 걸까요? [임주리의 영화로운 세계] 열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카슈끄지 대역 무스타파 알 마다니가 사우디 영사관에 들어가는 모습. [사진 CNN]

카슈끄지 대역 무스타파 알 마다니가 사우디 영사관에 들어가는 모습. [사진 CNN]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상상을 초월하는 공격을 받아 3000여 명이 숨지는 참혹한 일이 일어납니다. 사우디 갑부 집안 출신 오사마 빈라덴이 꾸민 일로, 테러범 대부분이 사우디 국적이라는 데 미국인들은 경악했습니다. 중동의 친한 친구라 여겼던 사우디가 ‘앞에서는 친한 척하면서 뒤로는 테러범들을 지원한 게 아닌가’ 하는 분노가 차올랐죠. 
 
그런데 좀 이상했습니다. 당시 조지 W 부시 정부는 유독 사우디를 감싸고 돌았거든요. “우리 정보 수집망이 적에게 노출될 수 있다”며 테러 진상 조사에 난색을 보였고, 의회가 조사하자 자료 공개를 꺼렸죠. 테러 희생자들의 유족이 사우디 왕가와 관련자들을 고소했을 때, 사우디 정부가 고용한 변호사가 부시 가문의 오랜 변호사였을 정도로 상황은 묘했습니다.
아버지 부시(왼쪽)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오른쪽),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사진 ABC뉴스]

아버지 부시(왼쪽)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오른쪽),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사진 ABC뉴스]

마이클 무어 감독이 ‘화씨 9/11’(2004)를 통해 폭로한 내용이죠. (이 작품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습니다.) 무어 감독은, 대통령이 되기 전 채굴회사 등을 운영했던 부시가 경영난을 겪을 때마다 오일머니를 쥔 사우디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이후 아버지(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 때부터 이어진 부시 가문과 사우디 왕실의 관계는 더더욱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는 거죠.  
 
그러면서 “부시는 9ㆍ11 테러로 위기에 몰린 사우디를 보호하기 위해 이라크를 희생양 삼아 공격했고, 결국 무고한 사람들만 죽었다”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미국 대통령과 사우디 왕실이 이토록 뜨거운 관계라니….  
재벌 출신인 부시와 트럼프에게만 국한된 얘기 아니냐고요?
다큐멘터리 '화씨 9/11'. 마이클 무어 감독(오른쪽)이 연출했다.

다큐멘터리 '화씨 9/11'. 마이클 무어 감독(오른쪽)이 연출했다.

백악관과 사우디 왕실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건 1943년입니다. 이븐 사우드가 아라비아반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해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신생 왕국을 만든 지 11년이 지난 때였죠. 무덥고 황량한 사막의 나라에 ‘검은 황금(석유)’이 흐른다는 것이 알려지며 러시아와 영국 등이 탐욕을 뻗던 시기였습니다.  
 
강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던 미국이 가만있을 리가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사우디의 석유를 반드시 미국의 것으로 만들겠단 결심을 합니다. 이븐 사우드 왕에게 특사를 보내고 호화로운 대접을 하며 정성을 쏟았고, 막대한 원조와 왕가의 안전 보장까지 약속하죠.
 
누구와 손을 잡을 것인가….  
고민하던 사막 나라의 왕은 1945년, 결정을 내립니다. 루스벨트였죠.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착취했던 영국보다는 멀리 떨어져 있는 미국이 안전할 거라고 판단한 겁니다. 그렇게 미국과 사우디는 손을 잡습니다.  
‘아차’ 한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이 부랴부랴 길을 나섰지만 기차는 떠난 뒤였죠.
 
20여년간 중동에서 활동한 전직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 로버트 베어는 저서 『악마와의 동침』에서 두 나라의 관계는 사우디가 탄생한 직후부터 석유로 끈끈하게 맺어졌다고 서술합니다. “사우디는 모래 밑에 미국의 석유를 보관”하고 있었고 “이 석유를 잃는 것은 미국이 연방준비은행을 잃는 것과 같았다”는 거죠.  
반대파를 모두 숙청하고 사우디의 실권을 장악한 빈살만 왕세자 [AFP=연합뉴스]

반대파를 모두 숙청하고 사우디의 실권을 장악한 빈살만 왕세자 [AFP=연합뉴스]

그뿐 아니었습니다.
 
“사우디는 온갖 곳에 돈을 뿌렸다. 백악관은 아프가니스탄 전쟁부터 니카라과 전쟁까지 의회가 돈을 대려 하지 않거나 또는 댈 수 없는 은밀한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손을 벌렸다. 워싱턴에 있는 모든 연구소들이 사우디의 돈을 받았다. 두 자릿수 IQ를 가진 어떤 워싱턴 관료라도 사우디에 줄을 잘 서기만 하면 이런저런 방법으로 사우디 여물통에 기대어 먹고살 수 있단 걸 알았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워싱턴 관료들이 사우디와 맞설 배짱이 없는 것이다.” (『악마와의 동침』에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68년 당선되자마자 달러 가득한 돈가방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죠. 꼭 ‘돈가방’이 아니어도 사우디는 백악관에 무척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예를 볼까요.  
 
클린턴이 당선된 1993년은 여객기 시장이 불황이던 때였습니다. 미국 보잉사도 큰 어려움에 부닥쳤죠. 클린턴은 일자리가 줄어들어 ‘표’가 떨어져 나갈까 두려웠습니다. 이때 그에게 구원의 빛이 내렸으니… 사우디였습니다. 사우디 국영항공사가 보잉 여객기를 대량 구입하겠다고 통 크게 사인했거든요. 이런 사우디를 챙기지 않을 도리는 없었을 겁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오일머니에 점령당한 워싱턴은 사우디 내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사우디는 안에서 썩어들어갔죠. 왕족의 사치와 부패, 커지는 민중의 고통, 이 때문에 점점 극단주의에 물들어 가는 젊은이들…. 왕실은 이 분노가 자신들에게 향하는 걸 막기 위해 극단주의 단체에 돈을 쥐여줬고, 이는 이슬람 극단주의가 활개 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됐습니다. 9ㆍ11 테러 역시 그 연장선에 있었죠.  
 
아까 영화 ‘시리아나’ 얘기를 하다 말았죠?  
영화 '시리아나' 속 한 장면. 가상의 중동 산유국의 개혁 군주가 되려는 나시르 왕자.

영화 '시리아나' 속 한 장면. 가상의 중동 산유국의 개혁 군주가 되려는 나시르 왕자.

이 나라(가상의 중동 산유국)의 둘째 왕자에게 접근한 이는 미국 거대 정유사의 임원이었습니다. “사우디 왕자들처럼 방탕하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 나시르 왕자가 미국이 아닌 중국과 계약하고, 오일머니를 국가 인프라에 투자하려고 한 게 마음에 안 들었거든요. 그래서 나시르 왕자 대신 둘째 왕자를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겁니다.  
 
중동 산유국이라면 모름지기 ‘사우디처럼 굴어야 한다’는 걸까요. 미국 정부는 정부대로, CIA 요원 밥(조지 클루니)에게 나시르를 암살하라고 지시합니다. 결말은 씁쓸하기 짝이 없습니다. “국회를 만들고 여자들에게 참정권을 주고, 생산 효율성을 극대화해서 그 돈으로 조국을 재건하겠다”는 나시르 왕자의 꿈은 처참히 짓밟히고 말죠.  
 
다시 현실로 돌아와.  
 
9ㆍ11 테러 이후 소원해졌던 사우디와 미국은 그럼에도 여전히 우방이었습니다. 하지만 중동 정세는 점점 복잡해지고 있고, 사우디는 카슈끄지 사태로 만천하에 그 민낯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워싱턴 역시 사우디가 이렇게 되도록 방조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겠죠.  
 
사우디 왕실의 진정한 변화가 없는 한 분노는 안에서부터 끓어오를지 모릅니다. 미국 역시 이대로라면, 중동발 극단주의를 감당할 수 없게 되겠죠.    
영화 '시리아나' 속 한 장면. 조지 클루니, 맷 데이먼 등이 열연했다.

영화 '시리아나' 속 한 장면. 조지 클루니, 맷 데이먼 등이 열연했다.

영화 속에서 나시르를 돕던 경제고문 브라이언(맷 데이먼)은 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석유는 고갈돼가고 있습니다. 저들 생각이요? 왕자님이 오일 머니로 방탕하게 살길 바라겠죠. 인프라 투자, 경제는 등한시해라…. 그러다 정신 차리면 석유는 없겠죠.”
 
어쩐지 사우디 왕실에 들려주고 싶은 말이네요.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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