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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트럼프의 판, 김정은의 수

김병연 서울대 교수 경제학부

김병연 서울대 교수 경제학부

트럼프의 판, 김정은의 수. 현재 북한 비핵화 구도를 읽는 키워드다. 이를 이해해야 비핵화 진전이 왜 이렇게 느린지, 대북제재를 둘러싸고 지금 일어나는 한·미 갈등 조짐을 어떻게 봐야 할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정책을 취해야 옳은지 알 수 있다.
 
미국은 최강대국의 힘과 자산을 활용해 비핵화 판을 짰다. 그 판의 세로 줄은 경제 제재, 가로 줄은 군사적 압박이었다. 경제 제재로 북한을 옥죈 상태에서 군사적 압박 강도를 조절함으로써 비핵화를 이끈다는 전략이었다. 비핵화로 가는 평화적인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이는 일단 성공했다.
 
미국은 비핵화 끝까지 이 판을 유지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불가역적인 비핵화에 선행하는 제재 완화나 해제는 미국의 선택 목록에 없다. 또 비핵화에 진전이 없는 경우 다시 군사적 압박으로 돌아가려 할 수 있다. 이른바 원상복귀 선택권을 가지려는 것이다. 미국은 이 구조를 흔드는 시도를 용납하기 어렵다. 판이 깨지고 구조가 무너지면 비핵화를 김정은의 선의에만 맡겨야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북한은 판을 짤 수는 없지만 수는 둘 수 있다. 북한의 최대 강점은 자신의 핵과 미사일에 관한 비대칭적 정보다. 핵과 미사일이 어디에 얼마나 있고, 어디에서 생산되는지 물론 그들만이 정확하게 알고 있다. 이를 활용해 집을 통째로 팔지 않고 헛간·외양간·다락방·사랑방 등으로 나누어 팔려고 한다. 핵 리스트를 신고해 집의 설계도가 알려지면 둘 수 있는 수가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동시에 비핵화의 핵심인 보유 핵과 미사일의 완전 폐기를 확실히 못 박지 않았다. 이는 협상을 잘 해 핵 보유를 암묵적으로 인정받으려는 술수일 수 있다.
 
지금은 트럼프의 판과 김정은의 수가 팽팽하게 맞선 국면이다. 진전이 어렵다. 한국 정부는 조급하다. 북·미 정상이 만나기만 하면 바로 완전한 핵 폐기가 될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는데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났어도 비핵화 성과는 기대 이하다. 또 바람 같은 트럼프의 마음이 북한에서 떠나든지, 혹은 그가 탄핵당하거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면 대북 강경 노선이 등장해 비핵화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을 것이다.
 
김병연칼럼

김병연칼럼

그러나 한국이 남북 경협을 이용해 ‘판’과 ‘수’를 중재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미국이 이를 북한의 수에 말려 제재를 허물려는 시도로 받아들인다면 한·미 간 신뢰는 큰 상처를 입는다. 북·미의 신뢰 결여에 더해 한국마저 미국의 신뢰를 잃으면 비핵화는 난망하다. 또 제재 대열에서 한국이 이탈하면 제재의 도덕적 정당성도 흔들린다. 중국과 러시아는 대환영이라며 제재의 뒷문을 더 열어줄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의 제재 완화를 적극 막으려 한다. 이것이 한국의 여러 은행에 미 재무부가 전한 ‘경고’의 배경이다. 판을 깨려 하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다.
 
한국 정부는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 가장 좋은 방안은 ‘핵심’과 ‘핵심’의 동시적 교환이다. 즉 북한은 ‘수’를 포기하고 미국은 ‘판’을 해체하는 것이다. 먼저 북한은 과거 핵을 포함한 핵 및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완전 폐기를 확실히 문서화해야 한다. 그리고 핵 리스트 신고와 상당수의 핵과 미사일 반출 중 적어도 하나를 조기에 실행해야 한다. 이에 상응해 미국은 대부분의 경제 제재를 해제하거나 혹은 광물 수입 금지 등의 핵심 제재를 풀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평화협정의 틀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 교환이 최선임을 김정은에게 분명히 밝혀야 한다.
 
차선의 방안도 준비해야 한다. 일단 ‘헛간’부터 팔려는 북한의 수를 전제하고 거기서부터 시작해 ‘안방’ 매각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단계에 상응하는 등가(等價) 조치를 한·미가 같이 만드는 것이다. 주고받는 것이 확실해야 북한이 움직일 유인이 커질 것이다. 그 디테일을 짜기 위해선 한국 전문가의 역량이 필요하다. 그들의 도움으로 무엇을 주고받아야 할지, 어떤 순차가 가장 바람직할지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핵화 과정은 단계마다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풀어야 하는 도돌이표 협상이 될 것이다. 로드맵의 일괄 협상과 타결, 그러나 단계적 집행이 성공의 관건이다.
 
‘판’과 ‘수’ 사이에 끼어 있는 한국에 가장 필요한 것은 냉철한 전문성이다. 북한 주민을 향한 가슴이 뜨겁지 않은 한국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뜨거움만으로는 비핵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 민족끼리’를 뜨겁게 외치다간 오히려 우리와 북한 주민의 평화가 불타버릴 수도 있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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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