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54년 전 어느 날, 아버지가 경찰에 잡혀갔다

여성작가가 보는 차별의 세상 
알고 싶지 않은 것들

알고 싶지 않은 것들

알고 싶지 않은 것들
데버라 리비 지음

영국작가 데버라 리비 에세이
어릴 적 남아공의 인종차별 회고
작가로 성장해가는 과정 돌아봐

‘나 자신의 목소리’를 찾다
흑인 보모 마리아가 남겨준 유산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용감해야

지금 글을 쓴다는 건 무엇인가
거짓말·신화·가난 등에 갇힌 세상
분노하라, 하지만 차갑게 적어라

이예원 옮김, 플레이타임
 
밖에는 지금 매서운 눈보라가 날리지만 난로에서 통나무가 타고 있어 방 안 공기는 훈훈하다. 그 옆 바구니에는 밤새 뗄 통나무가 여러 개 쌓여 있다. 고목 종려나무가 내다보이는 창가에는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다.
 
책상 위 책 두 권과 노트 한 권. 하나는 『사랑과 다른 악마들』, 또 하나는 조르주 상드가 첫 결혼에서 얻은 두 아이와 함께한 겨울을 기록한 『마요르카에서 보낸 겨울』. ‘폴란드, 1988’ 라벨이 붙은 노트는 그녀의 일기장이다.
 
그녀는 책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버지니아 울프를 생각한다. 『자기만의 방』에서 울프는 말했다. “차분히 글을 써야 할 때 그녀는 분노하며 쓸 것이다.” 그녀는 생각한다. 여자 작가는 “자기 인생을 지나치게 또렷이 느낄 형편이 못 된다. (…) 차분히 글을 써야 할 때 분노에 차 글을 쓰게 된다”고.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 나는 끼어들고, 소리 내어 말하고, 목청을 키워 말하고, 그보다 더 큰 소리로 말하고, 그러다가 종국에는 실은 전혀 크지 않은 나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는가.
 
그녀는 마침내 책상으로 가서 앉는다. 어쨌든 그녀는 쓰는 존재이고, 쓰기 위해 그곳 마요르카 숲속까지 날아왔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 현장. 데버라 리비의 아버지는 흑백 평등을 위해 싸우다 1964년 경찰에 잡혀갔다. [사진 폴 와인버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 현장. 데버라 리비의 아버지는 흑백 평등을 위해 싸우다 1964년 경찰에 잡혀갔다. [사진 폴 와인버그]

그녀는 깃털처럼 가벼워지려고 애쓴다. 그래야 무거움과 분노에서 벗어나 뭔가를 쓸 수 있으니까. “작가에게 있어 자기만의 방보다도 유용한 것은 전기 연장선,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사용 가능한 각종 변환 어댑터”라고 중얼거려보기도 한다.
 
그녀의 이름은 데버라 리비(Deborah Levy)다. 영국 작가인 그녀는 영어밖에 할 줄 모른다. 그렇잖아도 중국인 가게 주인으로부터 당신네 영국인은 어째서 할 줄 아는 말이 없느냐는 핀잔을 들었다. 그녀는 실은 순전한 영국인이 아니다. 남아프리카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냈다. 아홉 살 때 부모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했지만 그녀의 고향은 남아프리카다. 그녀의 기억 속 그곳의 밤은 얼마나 온화하고 별들은 또 얼마나 빛났던가.
 
그녀는 자신이 부단히 도망친 끝에 지금의 책상 앞에 가까스로 도달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치하고 교묘한 언어가 숨기는 거짓말로부터, 여자의 됨됨이와 태도가 어떠해야 한다고 떠들어대는 신화로부터, 교육받은 욕망으로부터.
 
그녀는 또한 망상들로부터 도망쳤다. 어머니라는 망상, 모성이라는 망상.
 
그리고 요구들로부터도. “수동적이되 야심 찰 것을, 모성적이되 성적 활력이 넘칠 것을, 자기희생적이되 충족을 알아야 한다는” 요구, “강인한 현대 여성 이어야 한다는” 요구.
 
그녀의 나이 다섯 살이던 1964년 어느 날, 인종 분리 정책이 횡행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 눈이 내린다. 평범하고도 특별하던 그 날 밤, 공안의 특별부 경찰관들이 그녀의 집 현관문을 두드린다. 그들은 백인과 흑인의 평등을 위해 싸우던 아버지를 소리소문없이 데려간다. 밤이 깊어가지만 두려움에 떠느라 잠들지 못하는 그녀에게 마리아가 속삭인다. "인종 분리 정책을 믿지 않으면 감옥에도 갈 수 있는 거야.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용감해야 한다, 너뿐 아니라 다른 많은 아이가 용감해야 해. 그 아이들도 아버지나 어머니를 뺏겼을 테니까.” 흑인 보모 마리아. 그녀는 마리아를 사랑했다. 하지만 마리아도 자신을 사랑했는지는 모르겠다. 인종 차별과 가난은 마리아에게 자신의 자식들과 격리되어 백인 아이들을 돌보게 했다.
 
데버라 리비는 한국 독자들에게는 생소하지만 2011년 『스위밍 홈(Swimming Home)』으로, 2016년 『핫 밀크(Hot Milk)』로 맨부커 쇼트리스트에 오른 저력의 작가다.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은 그녀의 자전적 에세이 3부작 중 첫 권으로,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여자아이가 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유년시절부터 ‘알고 싶지 않은 것들’과 고군분투하며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법’을 배우기까지, 지적이고도 사랑스러운 여정에 동행하는 것은 의미 있다. 그것이 잡음에 지나지 않던 목소리들을 전부 끄고, 온전히 ‘나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법’을 터득하는 내적 여정으로 고스란히 이어지기에.
 
"알고서는 도무지 살 수가 없는 종류의 앎을 두고 우리는 어찌하는가.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우리는 어찌하는가.” 머잖아 한국어로 번역되어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될 그녀의 소설이 기다려진다.
 
김숨 소설가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