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서경호의 시선] 원칙없는 유류세 인하에 반대한다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경제에도 법칙이 있고, 정책은 그 경제의 법칙을 존중하면서 법칙에 맞게 해 가야 하는 것이지, 단방 특효약이 어디 있습니까?”
 

시급하지도 않고 유가 더 오르면 대책도 없어
통합재정수지 곧 적자인데 돈 잔치 할 때인가

소득주도 성장을 비판하는 어느 점잖은 경제학자가 한 말 같지만, 아니다. 야당과 언론으로부터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라는 비아냥까지 듣던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2008년 1월 청와대 신년인사회에서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을 회고하며 한 발언이다. 집권 중에 경제를 살리기 위한 ‘비방의 특효약(인위적인 경기 부양)’은 결코 쓰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연평균 7% 성장과 10년 뒤 1인당 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 진입을 표방한 ‘747 공약’을 내세우며 대선에서 승리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을 겨냥한 말이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가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 특효약의 유혹을 뿌리친 건 맞다. 당시는 우리나라 원유 수입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두바이 유가가 배럴당 80달러를 웃돌며 사상 최고치에 다가가고 있었다. 유류세를 내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지난해 대선에서 모든 후보가 최저임금 인상을 공약으로 내걸었듯, 2007년 대선에서도 후보 대부분이 앞다퉈 유류세 인하를 공약했다. ‘환경 후보’를 표방했던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가 30% 인하 입장을 밝혔다가 철회했을 뿐,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10%,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는 20%, 이인제 민주당 후보는 3분의 1 인하 공약을 발표했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만이 유류세 인하 경쟁이 벌어진 대선판에서 “유류세 인하는 단기적이고 인기영합적인 정책”이라고 외롭게 외쳤다. 에너지 소비를 줄여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에 대응하자는 게 진보의 스탠스일 테니 당연했다. 여당 후보까지 유류세 인하를 요구했지만 노무현 정부는 마지막까지 원칙을 고수했다. 유류세를 내려도 복잡한 유통구조 탓에 기름값 인하로 이어질지 확실하지 않고 무엇보다 에너지 과소비를 부추길 수 있다는 이유였다. 2008년 집권한 이명박 정부는 공약대로 유류세를 인하했다.
 
그다지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지난해 대선에서도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의 유류세 인하 공약이 있었다. 대선 후보 토론에서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미세먼지 대책은 에너지 소비 줄이는 게 핵심”이라며 “서민 표를 얻으려고 유류세 인하한다는 포퓰리즘 공약은 그만 내라”고 꼬집었다. 며칠 전 홍 전 대표가 정부의 ‘뒤늦은’ 유류세 인하 방침에 “참 딱하기 이를 데 없는 정권”이라고 비판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김동연 경제부총리의 유류세 인하 발언에 찬성 여론이 많은 듯하다. 하긴 세금 깎아준다는 데 싫어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하기 전에 꼭 짚어야 할 게 있다. 첫째, 유류세 인하가 그리 시급한지 의문이다. 요즘 국제유가는 배럴당 80달러 정도다. 120~140달러를 오르내렸던 2008년과는 큰 차이가 있다. 한 전직 장관은 “아직은 국민이 버틸 만한 수준”이라며 “지금 유류세를 내렸다가 나중에 유가가 120달러 이상으로 치솟으면 그때는 대책이 있겠느냐”고 했다. 기획재정부는 현재 주유소 유류가격이 2008년과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10년간의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둘째, 유류세를 내린다고 주유소 유가가 떨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1999년 유류세를 51원 내렸지만 휘발유 가격은 최대 9원밖에 안 떨어졌다. 2008년에도 국제유가가 계속 오르면서 깎아준 유류세 효과는 눈 녹듯 사라졌다. 세수 1조4000억원만 축냈다.
 
셋째, 지금 당장 세금 잘 걷힌다고 돈 잔치 벌일 때가 아니다. 올 들어 8월까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4조원 가까이 세수가 늘긴 했다. 이미 1차 추경은 했고 예비비도 다 쓴 마당이니, 유류세 인하 카드는 국회 동의 없이 재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좋은 구실이다. 유류세가 연간 25조원 걷히니 6개월간 10% 내리면 1조2500억원을 경기 활성화에 쓸 수 있다. 하지만 ‘세수 호황’이라는 말처럼 허황된 것도 없다. 2018~2022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사회보장성기금을 포함한 통합재정수지는 내후년 적자로 돌아서고 갈수록 적자 폭이 커질 전망이다. 나라의 실질적인 수입과 지출을 보여주는 통합재정수지는 재정건전성의 척도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아닌데, 통합재정수지가 기조적으로 적자로 돌아선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남는 세수로 차라리 적자 국채를 갚는 게 나라 곳간을 지키는 재정 당국의 바람직한 자세다.
 
넷째, 철학과 비전이 없다. 서민 부담을 줄이겠다는 게 정부가 내세운 명분이지만 유류세 인하 혜택은 고소득층이 더 많이 누린다(2012년 한국지방세연구원 분석). 화석연료 소비를 줄여 미세먼지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감축하자는 정책 목표에도 어긋난다. 진보정당이 과거 대선에서 유류세 인하에 반대한 것도 그래서다. 이 정부에서 월급 받는 그 많은 진보 인사들은 지금 대체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서 유류세 인하를 섣불리 결정해선 안 된다. 노무현의 말처럼, 경제에도 지켜야 할 법칙이 있다. 
 
서경호 논설위원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