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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시선]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문재인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피고인은 국민으로부터 막강한 권한을 위임받은 대통령으로서 이를 오직 헌법과 법률에 따라 국민 전체를 위해 행사하여야 할 책무가 있었다. 그런데(…) 사건의 실체적인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피고인을 믿고 지지했던 국민들과 우리 사회 전반에 큰 실망과 불신을 안겨주었다.” “다시는 대통령이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을 함부로 남용하여 국정을 혼란에 빠뜨리는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피고인에게 엄중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연이어 읽어도 거슬림 없이 하나의 글처럼 읽히지만 서로 다른 글이다. 앞의 것은 지난 5일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1심 판결문이고, 뒤의 것은 4월 6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1심 판결문이다. 전직 대통령의 말로가 좋은 적이 없는 이 나라지만, 두 사람이 동시에 영어의 몸이 돼 재판을 받고 있으니 참으로 볼썽사납다.
 
21년 전 전두환·노태우 두 전 대통령이 함께 형을 산 적이 있어도 그들은 어차피 한배를 탄 몸이었다. 내란 음모와 내란 목적 살인의 같은 혐의를 받았고, 형량은 경중이 있었지만 함께 수감됐다 함께 사면돼 풀려났다. 그런데 이·박 두 사람은 서로 철천지원수 같았고 서로 부정하고 보복했는데 이처럼 함께 나락으로 떨어진 게 아이러니다.
 
두 사람의 혐의는 뇌물 수수 말고는 차이가 난다. 이 전 대통령에게는 횡령이 더해지고, 박 전 대통령한테는 직권 남용과 강요, 공무상 비밀 누설이 보태진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수렴한다. 권력의 오용이다. 국가의 주인인 국민으로부터 빌린 권력을 국가와 국민에게 해가 되도록 사용한 죄다. 국가와 국민에 대한 배임이다. 막스 베버 식으로 ‘응징’하자면 둘 다 목을 매달아야 한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베버와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의 대화가 그 이유를 설명한다. 루덴도르프는 1차 대전을 사실상 주도했던 인물로 전후 극우정치운동을 폈다. 베버가 민주주의에 대해 말한다. “인민은 그들이 신뢰하는 한 사람의 지도자를 선출한다. 대표로 선출된 사람이 말한다. ‘이제 아무 소리 말고 내게 복종하라. 인민과 정당들이 지도자의 뜻에 반대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루벤도르프가 답한다. "그런 민주주의라면 받아들일 만 하군.” 베버가 말을 잇는다. "임기가 끝나면 인민은 심판할 수 있다. 만약 지도자가 잘못했다면, 그를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베버는 ‘지도자 민주주의’를 주창한다. 지긋지긋한 관료주의를 타파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가 있는 민주주의다. 하지만 그 카리스마가 잘못 발휘되면 목 매달릴 각오를 해야 하는 민주주의다. 그런 불행이 없기 위해 갖춰야 할 지도자의 덕목으로 베버는 열정과 책임감, 균형감각을 꼽는다. 지도자의 불꽃 같은 열정이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책임감 있게 타오른다면 국가와 국민들로서는 축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박 두 사람은 기준에 많이 못 미치는 지도자였다. 한 사람은 열정만은 있었으되 국가와 국민이 아닌 자신만을 위한 장사꾼 열정이었고, 또 한 사람은 열정조차 없이 그저 군림하고 싶었다. 열정이 있어야 군림할 수 있다는 걸 아버지가 보여줬는데도 배우지 못했다.
 
죽은 권력을 비판하는 건 의미가 없다. 몰락의 이유만 되짚어도 족하다. 비판은 살아있는 권력을 향해야 한다. 이 글의 서두가 길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문재인 대통령의 열정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적어도 대통령이 된 뒤에는 그렇고, 특히 대북 평화를 향해서는 그렇다. 책임감도 그를 둘러싼 참모들에 비해선 월등히 높아 보인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도 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을 조화하는 능력, 즉 균형감각은 여전히 의문부호로 남는다. 베버는 지도자가 정치의 이상과 현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강조한다. 신념윤리는 수단으로서의 가치 합리성이고, 책임윤리는 결과를 따지는 목적 합리성이다. 신념 실현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신념윤리라면, 행동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게 책임윤리인 것이다.
 
이 기준으로 보자면 문재인 정권은 책임윤리보다는 신념윤리에 더 무게중심이 옮겨가 있다. 이런 경우 결과가 의도와 어긋났을 때 남 탓을 하게 된다. "내가 아니라 세상이 어리석고 비열하기 때문이며, 나는 이 어리석음과 비열함을 뿌리 뽑을 것” 이라고 말이다. 각종 인사 오류와 정책 실패에서 벌써부터 그런 모습이 나타난다. 적폐 청산에 그토록 중점을 두는 이유도 여기서 설명된다. 베버에게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 "신념윤리와 책임윤리가 대립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 돼야 한다”는 것 말이다. 책임윤리만 강조했다가는 아무 일도 못 할 테지만, 신념윤리만 고집했다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결말에 직면하게 된다. 문제는 균형이다. 그것이 나와 다른 생각을 듣는 것임은 설명이 필요 없다. 서두르지 않고 돌아가야 똑바로 멀리 갈 수 있는 것이다. 정말 이 땅에서 지도자의 불행한 말로가 반복되는 사례가 더 이상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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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