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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프리허그’한 예비 올케, 그때의 당혹감이란

기자
송미옥 사진 송미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54)
올케는 우리 형제의 화합을 이루는 중심에 있다. 동생도 처가에서 일등사위라고 한다. 처가에서 눈 오는 날의 부부 망중한. [사진 송미옥]

올케는 우리 형제의 화합을 이루는 중심에 있다. 동생도 처가에서 일등사위라고 한다. 처가에서 눈 오는 날의 부부 망중한. [사진 송미옥]

 
쉬는 날은 가끔 젊은 새댁이 경영하는 식당으로 아르바이트하러 간다. 한동안 볼일이 겹쳐 못 가다가 엊그제 오랜만에 가니 버선발로 반기듯 나를 꼭 안고는 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참 서로 등을 토닥이며 서 있었다.
 
‘아주 힘들고 바빴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짠해 왔다. 직원을 구하기 힘든 위치이다 보니 둘이서 들고 나르고 하며 얼마나 뛰었는지 얼굴이 반쪽이 돼 있었다. 내가 피곤해도 올 수 있는 날은 와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그냥 들었다.
 
지인 만나 '프리허그'하다 오해사기도
한동안 ‘프리허그’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요즘은 친한 사람끼리도 잘못하면 감옥 가는 행동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아는 지인을 만나면 남녀노소 막론하고 꼭 안아주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어느 땐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지나고 나면 이해를 하고 좋아해 주었다.
 
오래전 언젠가 서울에 살 적에 엄마는 초기 위암 진단을 받고 가벼운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이 있는 대구에 내려가게 됐다. 아버지도 거기서 만난다는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기차를 타고 다시 버스를 타며 긴 시간을 보내면서도 피곤함도 잊고 병원을 향해 달려갔다. 병원 문이 좌우로 있었는데 병원에 들어서니 아버지가 2층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연락 없이 간 터라 깜짝 놀라시겠구나 생각하며 걸어가는데 아버지가 나랑 반대쪽으로 가고 계시는 거다. 그쪽을 보니 곧 시집올 남동생의 여자 친구가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나는 놀라서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 여자 친구가 달려가서는 아버지 품에 안기는 것이다. 아니 그가 아버지를 안아드리는 것이었다. 토닥토닥하던 두 사람은 무슨 대화를 연신 하며 2층으로 함께 올라갔다. 나는 그날 병원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는 기억에 없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종일 울었던 기억만 뚜렷이 난다. 엄마는 걸어서 들어가 그렇게 암 수술을 받다가 병원 문을 다시 못 나오셨다.
 
우리는 그 나이가 되도록 아버지의 가슴에 손을 대본 일도 없을 뿐더러 손을 잡고 걸어보지도 않았다. 아버지의 존재는 저 높은 곳에 계시는 어른이셨다. 농담도 흐트러짐도 없이 그냥 내 마음속에 기둥으로만 살았다. 그러니 아버지와 남동생 여자친구의 그런 모습은 생소하고 너무 낯설어 오랫동안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지난해 가을, 동생 가족이 경북 영덕군 근처로 여행 가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왼쪽부터 큰 조카, 올케, 셋째 조카, 남동생, 둘째 조카. [사진 송미옥]

지난해 가을, 동생 가족이 경북 영덕군 근처로 여행 가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왼쪽부터 큰 조카, 올케, 셋째 조카, 남동생, 둘째 조카. [사진 송미옥]

 
남동생의 부인은 대가족이 함께 살아온 화목한 가정이었다. 그렇게 증조부까지 한집에서 부대끼며 살아온 젊고 슬기로운 올케가 홀로된 아버지를 모신다며 바로 시집을 왔다. 그의 출현은 엄마까지 떠나고 나서 조용하고 어두운 집안의 분위기를 휙 바꾸어 버렸다. 자신의 할아버지 나이일 법한 시아버지와 친할아버지 처럼 편하고 스스럼없이 지냈다. 밤이면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화투를 함께 치느라 날마다 화투판을 벌였다.
 
아버지가 엄마랑 화투를 치는 것은 이해가 갔지만 새파랗게 젊은이들 화투판에 어울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시장을 갈 때도 올케는 늙으신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시장통을 돌아다니니 모두 그가 딸인 줄 알고 계셨고 우리는 졸지에 심통 부리는 며느리 꼴이 되었다.
 
홀로된 아버지를 가슴으로 안아준 올케
어머니를 곧 따라가실 것 같이 골골하던 아버지는 10년을 더 살다 돌아가셨다. 냉정하고 조용한 분으로만 기억되던 내 아버지를 가슴으로 안아주던 올케의 고마움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내 아이들에게도 외숙모를 롤 모델로 삼아 살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늘 말한다. 부모가 안 계신 지금까지도 형제자매가 화기애애한 것은 한 사람의 넓은 가슴이 없이는 절대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요즘은 인사를 하고 반가움을 표할 때는 서양식으로 하자며 농담처럼 프리허그를 하곤 한다. 그가 아버지를 따뜻하게 안아주던 그때부터 내 마음도 변한 것 같다.
 
사회는 빛과 같은 속도로 발전하고 변해가지만, 사람의 마음은 너무 팍팍하고 매말라 공허하기가 이를 데 없다. 물질적인 것은 줄 수가 없지만, 마음이라도 따뜻하게 안아준다면 무겁게 짓눌린 어깨가 스르르 펴지고 그 온기로 일주일은 따뜻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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