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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도 제압한 조선 조총부대는 왜 사라졌을까

유성운의 역사정치㉙ 막강했던 조선 조총부대는 왜 사라졌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그려진 대한제국 육군의 모습은 오합지졸에 가깝습니다. 조선인 출신 미국 해병대 장교 유진 초이가 교관으로 부임했을 때 이들은 기본적인 제식 훈련부터 총기를 다루는 기술까지 모든 게 걸음마 수준에 가깝죠. 오히려 정규군보다 의병에 가담한 포수들의 실력이 훨씬 빼어나 드라마에선 이들의 맹활약에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영화 '남한산성'에 나오는 조선의 조총부대

영화 '남한산성'에 나오는 조선의 조총부대

하지만 조선군의 사격술은 한 때 동아시아, 아니 어쩌면 세계에서 수준급으로 인정받을 만큼의 실력을 갖춘 적도 있었습니다. 소위 ‘국뽕’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단지 시작은 대단히 미약했고, 또 첫 만남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

 
임진왜란, 조선이 조총에 눈 뜨다 
“왜노가 비록 전투에 익숙하고 날래게 진군했으나 그들이 승리를 얻은 것은 실로 이 조총 때문이다.” (이수광, 『지봉유설』)
날아가는 새도 잡는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조총(鳥銃)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에겐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화살과 달리 맞으면 즉사하는 경우가 많은데다 소리도 요란했기 때문에 수 백명이 연달아 조총을 쏘면 말 그대로 '혼비백산'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동래성 전투' 뮤지컬로 재현 임진왜란 때 치열했던 동래성 전투가 뮤지컬로 재현하는 시연회 [중앙포토]

임진왜란 '동래성 전투' 뮤지컬로 재현 임진왜란 때 치열했던 동래성 전투가 뮤지컬로 재현하는 시연회 [중앙포토]

당시 일본 보병은 조총병ㆍ궁병ㆍ창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외교에서 맹활약을 한 이덕형(한음)은 “가장 먼 곳에서 철환을 쏘고, 다음은 창으로 찌르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벤다“고 설명했습니다.  
조선군과 대치했을 때, 조총병이 선제 사격을 하고 2선으로 물러나면 궁병이 활을 쏘아 조총병의 장전 시간을 벌어주고, 조총병이 재차 사격을 가해 전열을 흐뜨러뜨리면 기마병이 돌격해 전열을 붕괴시키고 창병이 백병전을 벌이는 식이었던거죠. 조총병은 일본군이 가진 ‘비대칭 전력’이었던 셈입니다.
 
육군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동래부 순절도. [사진 제공=부산박물관]

육군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동래부 순절도. [사진 제공=부산박물관]

조총병을 앞세운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왔습니다.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군 1만8000명이 부산포에 상륙해 다음날 3시간만에 부산진성을 점령했고, 이튿날엔 2시간만에 동래성을 공격해 함락시켰습니다. 이어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이 이끄는 조선 최정예 부대를 전멸시키고 5월 3일에 한양에 입성했으니, 한반도에 상륙한지 불과 20일만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 지도층에서는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조총을 확보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 와중에 시작한 조총 연구 
전쟁 이듬해인 1593년 2월부터 조선은 훈련도감과 군기사에서 조총을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조총 쏘는 법도 가르치고 무과 과목에 조총 분야를 신설했습니다. 또 1593년 7월엔 무과 기준을 수정해 점수가 부족한 자에겐 조총 세 자루를 쏘게 하여 한 번 이상 (목표물을) 맞힌 자는 모두 선발하게 했습니다. 또한 개발에 참고할 '샘플' 확보에도 힘쓰죠. 
 
“지금부터 전장에서 얻은 조총은 함부로 사용하지 말고 모두 거두어 각 진의 군사들로 하여금 이를 학습하게 합시다. 그리하여 그 이치를 터득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성의있게 가르치도록 하소서.” (『선조실록』 26년 11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사용한 개인 화기인 소소승자총통. 2012년 명량대첩 해역에서 건져 올렸다. 길이 58㎝, 지름 3㎝, 무게는 약 2㎏ 정도다. [사진제공=문화재청]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사용한 개인 화기인 소소승자총통. 2012년 명량대첩 해역에서 건져 올렸다. 길이 58㎝, 지름 3㎝, 무게는 약 2㎏ 정도다. [사진제공=문화재청]

1594년엔 유성룡이 직접 도제조가 되어 조총과 화약제조를 책임지게 됩니다. 유성룡이 발탁된 것은 조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당시 몇 안 되는 지도층 인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문집에서도 조총의 가치에 대해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기효신서』(명나라 군사서적)에서 말하기를 조총은 명중하는 묘가 활이나 화살보다 다섯 배나 되고 쾌창보다 열배나 된다.” “조총은 한 달 동안 뚫어야 상품이 되며 이 조총 한 자루는 한 사람이 한 달의 힘을 쓴 뒤라야 사용할 만하니 만들기 어려워서 귀한 것이 이와 같다.” (『서애집』)


문신 유성룡이 임진왜란 동안 경험한 내용을 기록한 징비록. [사진=문화유산국민신탁]

문신 유성룡이 임진왜란 동안 경험한 내용을 기록한 징비록. [사진=문화유산국민신탁]

중앙 정부와는 별도로 이순신도 조총을 자체적으로 연구했습니다. 휘하 군관 정사준, 수군 이필종, 사노 안성 등에게 조총을 연구하도록 해 1593년 8월엔 일본 조총과 비슷한 정철총통(正鐵銃筒)을 만들어 조정에 진상하기도 했습니다. 성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히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일본제에는 미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넉달 뒤 선조는 이렇게 말했으니까요.  
“우리나라에서 만든 조총은 모두 거칠게 만들어서 쓸 수가 없다. 이제는 이렇게 하지 말고 왜인의 정밀한 조총을 기준으로 삼아 일체 그대로 제조하게 해야 한다.” (『선조실록』 26년 12월)
이처럼 국가 역량을 총동원하다시피 했지만 조총 연구는 좀처럼 진척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2014년 개봉한 영화 '명량'. [중앙포토]

2014년 개봉한 영화 '명량'. [중앙포토]

사실 일본도 조총 개발에 손쉽게 성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543년 8월 25일 다네가시마에 표류한 포르투갈인으로부터 조총을 처음 얻었을 때 남긴 기록만 봐도 조선과 별 차이가 없었죠. 
 
“길이가 2~3척이고, 몸체는 안이 뚫려있고 바깥으로 쭉 뻗어있다. 한 개의 구멍은 불이 지나가는 길이다. 그 형상은 비유할 물건이 없다…그것이 나갈 때에는 전광을 만들어내는 것 같고 울림은 우레와도 같아서…한 번 쏘면 은산도 깨뜨리고 철벽도 뚫을 수가 있다.” 
 
그런 일본이 조총을 만들어내기 까지는 수 년에 걸쳐 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고, 전국시대의 실전 투입 경험을 통해 최적화 전술을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전쟁 와중에 조선이 이를 자체 개발해 전력화시킨다는 것은 아이폰을 접한 개발도상국에서 스마트폰을 개발한다는 거나 다름이 없었죠.
 
조총이 결정적 역할을 한 일본의 나가시노 전투. 오다 노부나가의 조총부대는 당대 최강이라 불리던 다케다 군의 기마부대를 무력화시켰다. [중앙포토]

조총이 결정적 역할을 한 일본의 나가시노 전투. 오다 노부나가의 조총부대는 당대 최강이라 불리던 다케다 군의 기마부대를 무력화시켰다. [중앙포토]

결국 조선 조정은 발상을 전환하게 됩니다. 자체 개발이 안 되면 기술 인력을 스카우트하는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때는 전쟁 중이었습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왜인 포로, 조총 개발에 투입되다
1593년 2월 왜군에 협조한 김덕회라는 인물이 체포되자 선조는 직접 “적의 정세 및 염초(焰硝)와 조총의 제작법과 도검 취색의 방법을 속히 낱낱이 추문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하지만 조총 제조라는 것이 어깨 너머로 배울 수 있는 기술은 아니었죠. 
김덕회는 “조총과 철환과 철통은 하나도 만들지 않고, 다만 먹같이 까만 화약을 소반 위에 쌓아 놓고 칼가루로 부수고 다듬이 돌에 찧는 것을 날마다 일삼는데 이것이 무슨 일인지 모른다”고 자백했습니다. 선조로서는 크게 실망했을 대목이죠. (『선조실록』 26년 2월 21일)
 
세종실록 125권에는 가뭄과 흉년으로 인해 원래 봄으로 예정됐던 과거 시험을 가을로 미루게 된 과정이 설명돼 있다. [사진제공=문화재청]

세종실록 125권에는 가뭄과 흉년으로 인해 원래 봄으로 예정됐던 과거 시험을 가을로 미루게 된 과정이 설명돼 있다. [사진제공=문화재청]

그러자 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투항한 왜인들로부터 조총과 화약의 제조법을 적극 수용해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죠.
 
“이번에 생포한 왜인이 염초 굽는 법을 안다고 하는데, 이 왜인은 죽여 보았자 이익이 없을 것이니 그의 목숨을 살려주어 속히 오응림, 소충한을 시켜 장인을 데리고 그 방법을 다 알아내도록 병조판서 이항복에게 은밀히 전하라.” (『선조실록』 26년 3월 11일)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 장관인 이항복에게 밀명을 내려 적군 포로를 처형하지 말고 조총에 필요한 기술을 빼내도록 지시한 것이죠. 석 달 뒤에도 비슷한 명령을 내립니다. 또한 처우에 대해서도 특별히 신경쓸 것을 당부합니다. 
 
조선시대 일본에서 수입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총. 기존의 총통과는 달리 방아쇠를 당기면 화승이 끼워져 있는 용두가 앞으로 넘어져 점화하여 탄환이 발사되는 화승총이다. [사진제공=강화전쟁작물관]

조선시대 일본에서 수입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총. 기존의 총통과는 달리 방아쇠를 당기면 화승이 끼워져 있는 용두가 앞으로 넘어져 점화하여 탄환이 발사되는 화승총이다. [사진제공=강화전쟁작물관]

“생포한 왜인 2명 가운데 한 명은 염초를 구울 줄 알고, 한 명은 조총을 만들 줄 안다고 하니 염초를 굽는 자는 영변으로 보내 가을부터 시작하면 많은 염초를 구워낼 것이고 조총 만드는 자는 철이 생산되는 고을에 보내면 많은 조총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왜인들에게 아직도 족쇄를 채웠다고 하는데, 죽이지 않기로 작정하였다면 이와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족쇄를 풀어주는 것이 어떻겠는가.”(『선조실록』 26년 6월 16일) 
 
“이 왜인은 포수로서 쏘는 법이 귀신처럼 빨라 견줄 데가 없으며, 도창(刀槍) 등의 법을 꽤나 잘 이해하니, 훈련 도감에 소속시켜 급료를 주어 전습케 하되 부득이한 연후에 후속 조치를 취하는 것이 옳다. 지나치게 의심할 필요가 없다. 영웅의 수단이 어찌 이와 같은가.” (『선조실록』 27년 2월 29일)
 
 선조 '어필 병풍'의 일부. [사진제공=국립고궁박물관]

선조 '어필 병풍'의 일부. [사진제공=국립고궁박물관]

“왜인이 투항해 왔으니 후하게 보살피지 않을 수 없다. 묘술을 터득할 수 있다면 적국의 기술은 곧 우리의 기술이다. 왜적이라 하여 그 기술을 싫어하고 익히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고 착실히 할 것을 비변사에 이르라”(『선조실록』 27년 7월 29일)
 
이때 활약한 일본인 중 대표적인 인물이 김충선입니다. 본래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 장수 사야가(沙也可)였던 그는 조선으로 귀화해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받고 조선군에서 맹활약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모하당문집』에는 그가 임진왜란 당시 조총 개발에도 큰 기여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KBS 사극 '임진왜란'에서 김충선

KBS 사극 '임진왜란'에서 김충선

“조총과 화포는 그 때 일본군이 가진 특수한 무기로서 우리나라가 처음에 패전을 거듭한 것은 우리가 아직 이 총포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이 이에 총포 만든는 법을 가르쳤으니 이 사실은 당시 여러 진중에 오고 간 글월로써 넉넉히 증거할 수 있다. 이로부터는 일본이 가진 특수무기를 우리도 가지게 된 것이니 결국 수복한 공은 실제로 공의 힘이 컸다.”(『모하당문집』)
 
그의 아들 김경원에 따르면 “아버지(김충선)가 투항한 후 1593년 조정은 훈련청을 설치하고 항왜(항복한 왜군) 300명을 모집해 화약을 만들고 화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조선의 조총 개발 성공 이면엔 많은 일본인들의 노하우 전수가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귀화한 김충선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대구시 달성군 오록리 녹동서원 [중앙포토]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귀화한 김충선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대구시 달성군 오록리 녹동서원 [중앙포토]

 
러시아군을 격파한 조선 조총부대 
이런 노력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임진왜란 막바지인 1597년 1월 판중추부사 윤두수가 조총을 제조할 줄 아는 투항한 왜인을 서울로 불러 조총을 제작케 하자고 건의하자 선조는 “우리 장인들도 역시 잘 만든다”며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조총 개발이 꽃을 피운 건 반 세기 가량 지난 나선정벌입니다. 청나라는 아무르강 일대까지 진출한 러시아 군대와 충돌했는데, 전력에서 열세를 보이자 조선에 조총 부대 파병을 요청합니다. 
조선·청 연합군은 러시아군에 맞서 승리를 거뒀는데 청나라 측은 당시 맹활약한 조선 조총 부대의 실력에 크게 놀라기도 했습니다. 1차 나선정벌의 성과에 고무된 청나라 측은 2차 나선정벌에서도 조총부대 파병을 요구했습니다. 이 때 조선의 베테랑 사수들이 투입됐는데, 이들 조총부대 200명은 청나라 조총부대의 요청으로 시범 사격을 보일 정도로 이미 압도적인 실력차를 인정받은 상황이었습니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조선의 조총부대. [중앙포토]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조선의 조총부대. [중앙포토]

2차 나선정벌에서 조·청 연합군은 대승을 거둡니다. 러시아군은 전사자 220명을 낸 반면 조선군은 8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수치를 기억해주세요.) 러시아의 남하는 중단됐고, 청과 러시아는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현재 영유권을 인정하는 선에서 마무리 됐습니다. 

 
당시 유럽에선 일정 대형을 갖추고 일제 사격을 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지만 조선 조총수들은 머스킷으로 조준 사격해 명중률이 높았습니다. 당시 조선이 파병한 조총수들은 전국에서 엄선한 특등 사수들로 일정거리 이내에서 3발을 쏴서 2번 이상 표적에 맞추어야 파병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당시 총의 성능을 감안하면 대단히 높은 명중률에 속했다고 합니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조선의 조총부대. [중앙포토]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조선의 조총부대. [중앙포토]

하지만 조총이 조선의 역사 기록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이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조선은 이후 200여년 간 전란이 없었고, 지배층들은 붕당정치에 휩쓸리면서 성리학적 질서 확립에 골몰하게 됩니다. 또한 삼정의 문란으로 조세 질서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기술 개발은 커녕 조총 부대를 유지할 국방비조차 확보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죠. 
 
 1907년 일본에 맞서 무장한 의병. 영국의 '데일리메일'에 게재된 사진 [중앙포토]

1907년 일본에 맞서 무장한 의병. 영국의 '데일리메일'에 게재된 사진 [중앙포토]

이후 병인양요나 신미양요 등의 역사를 보면 조선 조총 부대의 활약상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서양의 앞선 무기에 밀렸지만 열심히 항전했다는 정도에 그칠 뿐이죠. 조선의 승리로 배우는 신미양요에서도 조선군은 전사 343명이 발생했지만 퇴각한 미군은 전사자 3명에 그쳤습니다. 
200여년 전 나선정벌에서 러시아군과 싸웠을 때 결과와 비교하면 어떤가요. 당시 러시아군의 발길을 멈추게 한 것과 달리 이 때 공개된 조선군의 열악한 전력은 이후 열강들의 침략을 막는데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

얼마 전 미국의 차세대 훈련기 사업에서 기대를 모았던 한국항공우주(KAI)가 탈락했습니다. 유력하다고 기대를 모았던 영국의 원전 수주도 고전하고 있습니다. 
방위 산업이나 원자력 기술 모두 우리가 원조는 아니지만 수 십여년에 걸쳐 국가적 육성과 많은 세금을 투입해 세계적인 수준을 갖게 된 산업입니다. 이제 그 결실을 수확할 때였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문제는 최근 벌어진 일련의 상황들이 실제 경쟁력의 문제라기보다 정치적 '외풍' 때문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경남 사천의 한국항공우주산업(KAI) 공장에서 KAI가 독자 개발한 고등훈련기 T-50을 조립하는 모습 [중앙포토]

경남 사천의 한국항공우주산업(KAI) 공장에서 KAI가 독자 개발한 고등훈련기 T-50을 조립하는 모습 [중앙포토]

최근 사이먼 테일러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원전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이 탈원전을 하려는 이유가 궁금하다”며 “시간이 지나면 해외 원전 수주도 어려워져 산업 기반이 와해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 KAI의 차세대 훈련기 사업 탈락에도 최근 진행된 적폐청산 과정에서 KAI가 검찰 수사를 받는 환경이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았냐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정권 교체마다 정치적 판단에 따라 핵심 산업의 흥망이 좌우된다면 두고두고 후회스러운 일이 되지는 않을까요. 그 손해 역시 후세의 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노성환 『조총을 통해서 본 한일관계』, 김성우 『임진왜란 시기 관군은 왜 약했는가?』, 계승범 『17세기 중반 나선정벌의 추이와 그 동아시아적 의미』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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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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