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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의 시선] 그래서 우린 헬조선을 탈출했나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세월호와 촛불시위, 그리고 헬조선이 있었다.

 
문재인 정부 사람들은 야당 시절 ‘헬조선’ 프레임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수많은 팔로워를 거느리며 젊은층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파워 인플루언서였던 조국 당시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현 청와대 민정수석)는 2015년 말 페이스북에 한국을 “청년 착취 체제 ‘헬조선’”이라고 정의했다. 그러고는 “정권교체가 이뤄지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더욱 수렁에 빠져 ‘헬조선’이 ‘민주공화국’을 대체할 것”이라거나 “‘헬조선’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선동적인 발언을 쏟아냈다. 문재인 정부 경제 투톱의 한 축인 장하성 정책실장(당시 고려대 교수)도 비슷한 시기 중앙일보에 기고한 ‘헬조선을 헤븐 대한민국으로’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2030세대가 체제에 순응하며 자기계발이나 힐링 따위에만 몰입한다면 한국은 미래가 없다”며 “다른 나라에 없는 비정규직이나 인턴을 없애달라고 요구하라”고 꾸짖었다. “헬조선으로 분노한 2030이여, 이제 행동하자”며.

 
한마디로 ‘작금의 한국은 기득권의 착취로 청년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일자리는 언감생심 비정규직이나 인턴밖에 할 수 없는 지옥 같은 사회이니 뒤집어엎자’는 얘기다. 누가 반박이라도 하면 더 거세게 공격했다. 당시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세계가 대한민국의 성장을 부러워하는데 정작 나라 안에선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유행한다”고 개탄하자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헬조선의 책임은 정치의 실패, 특히 집권 여당(새누리당)의 책임이 크다”고 받아쳤다. “여당 대표의 발언이 경악스럽다”며 날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세월호의 여진이 이어졌고, 광화문의 촛불이 있었으며, 탄핵으로 대통령이 바뀌었다. “대한민국은 이젠 ‘헬조선’이 아니라 ‘문재인 보유국’이 됐다”는 지난 5월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당시 대표의 말마따나 좌파 엘리트와 정치인이 연일 구사하던 헬조선 프레임이 사라졌다. 지난 정권 땐 한국에서의 익숙한 불행을 떠나 호주에서의 낯선 행복을 찾는다는 장강명의 장편소설(2015년) 제목처럼 ‘한국이 싫어서’ 자발적인 ‘코리아 난민’이 된다고 떠들썩하더니 그런 말들도 함께 쑥 들어갔다. 정말 정권이 바뀌니 조 수석과 장 실장의 바람대로 헬조선에서 탈출해 갑작스레 ‘헤븐 대한민국’으로 거듭나기라도 한 걸까.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하지만 숫자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한다. 사람들은, “헬조선이라 못 살겠다”던 그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 한국을 떠나고 있다. 한국 국적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국적이탈자 수가 연일 사상 최대치를 갱신하고 있으니 말이다. 헬조선 논란이 최고조에 달했던 2015년과 2016년에 각각 1000명 수준이었던 국적이탈자는 2017년 1905명으로 크게 늘어나더니 올해는 상반기에 이미 5804명을 기록했다. 그 이후로도 7~8월 단 두 달 동안 지난해 한 해 이탈자와 맞먹는 1600명 가까이가 한국 국적을 버렸다. 그렇게 한국을 버린 사람 열에 일곱(72.3%)은 미국을 택했다.

 
일부에선 지난 5월 1일 시행된 재외동포법을 앞두고 이뤄진 군 면제용 국적포기라고 주장하고, 법무부는 “인력 부족으로 처리 못한 이탈 신청을 집중 처리한 때문”이라고 해명한다. 여러 요인이 얽혀 있겠지만 올 들어 국적이탈자가 급증한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일자리가 없어 먹고 살기 어려워서다. 과장이 아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소득주도 성장이 본격화한 올 들어 고용 관련 지표가 점점 나빠지고 있다. 1~8월 실업자 수는 월평균 112만9000명으로 8개월째 100만 명을 넘기면서 관련 통계를 작성한 1999년 이래 가장 많았다. 특히 15~29세 청년실업률은 올 2분기에 10.1%까지 치솟았다. 오죽하면 정부가 공기업을 동원해 두 달짜리 단기 아르바이트를 고용해 고용지표를 개선하려는 꼼수를 부리다 걸렸을까. 그런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양질의 일자리가 늘고 있으니 국민에 적극적으로 설명하라”며 현실과 동떨어진 발언만 하고 있으니 앞으로가 더 캄캄하다. 반면 미국은 고용 시장에 훈풍이 부니 기회 없는 조국 대신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악화하는 경제지표에 이 정부 지지자들은 “지난 10년 동안 망쳐놓은 걸 어떻게 500일 만에 되돌려 놓느냐”며 또 다시 전 정권과 전전 정권 탓을 하지만 궤변일 뿐이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신작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미국이나 독일, 캐나다, 호주로 이민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 러시아로 이민 가는 게 꿈이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며 ‘사람들은 발로 투표한다’는 도발적이면서도 지극히 상식적인 논지를 편다. 하라리 주장처럼 좌파 엘리트들의 선동적인 입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발을 따라가 보면 그때가 아니라 지금이 떠나고 싶은 헬조선인지 모른다.

 
헬조선을 탈출하라고, 헬조선에 분노하라고 부추겼던 조 수석과 장 실장에게 묻고 싶다. 우리는 이미 헬조선을 탈출했는지, 만약 아니라면 이제라도 분노하며 탈출해야 하는지 말이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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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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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