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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계곡에서 탈출한 미 해병, 그들은 왜 싸웠나

장진호 전투에서 빛난 해병 정신
1950년 겨울 장진호는 혹독하게 추웠고 처절했다. 한반도 통일 자락이 손끝에 닿았다가 달아났다. 당시 100년 만에 한반도를 찾아왔다는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미 해병 1사단은 중공군 7개 사단과 사투를 벌였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공군외에 추위와도 싸웠다. 장진호 전투다. 미국에선 일본식 지명 발음을 따라 초신(Chosin)전투라 부른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혈투였다. 지난 10일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장진호 전투 68주년을 기린 추모행사가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주관으로 열렸다.  
 
장진호 전투는 중공군의 공격이 개시된 50년 11월 27일부터 미 해병대가 전투지역을 완전히 벗어난 12월11일까지 장진호∼함흥 사이에서 벌어졌다. 전투는 『장진호 서쪽 지역→장진호 남쪽 끝에 위치한 하갈우리→죽음의 계곡→고토리→황초령』으로 이어졌다. 이 전투에 힘입어 북한 동북부 지역에 있던 유엔군 병력 10만5000명과 함께 피난민 10만명도 무사히 흥남부두를 탈출할 수 있었다. 당시 피난민 대열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포함됐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6월 미 버지나아주 콴티코 국립해병대박물관의 장진호전투기념비를 찾아 “장진호 용사들이 없었다면, 흥남철수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제 삶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고 얘기한 적 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이 전투는 마오쩌둥(毛澤東)이 그해 11월 5일 팽더화이(彭德懷)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원에게 “적(미군)을 유인해 각개 섬멸하라”는 지시에 따라 이뤄졌다. 당시 유엔군은 낭림산맥을 기준으로 미 8군이 북한의 서쪽 산악지역을, 10군단이 동쪽을 맡았다. 10군단에 소속된 미 해병 1사단은 장진호를 거쳐 낭림산맥을 넘어 강계로 진출해 8군과 연결해 통일을 마무리하는 임무를 받았다. 중국은 마오의 명령으로 10월 말부터 중공군 30만명을 한반도에 투입했다. 이 가운데 9병단 12만명이 장진호 쪽으로 갔다. 이에 상대하는 유엔군은 올리브 스미스 소장이 이끄는 미 해병 1사단과 항공대 및 영국군을 포함해 3만명이었다.
 
중공군이 한반도에 불법 개입하기 전만 해도 유엔군은 곧 통일하고 크리스마스 휴가는 고향에서 보낼 것으로 생각했다. 북한군은 이미 궤멸한 상태였다. 그러나 중공군이 가세하면서 전세가 뒤바뀌었다. 압록강 서쪽까지 진출했던 미 8군은 18만명의 중공군의 공세에 패퇴했지만 신속하게 후퇴했다. 그런데 동쪽의 장진호 지역은 험한 산악지형에다 사실상 외길로 철수해야 했다. 문제는 중공군 9병단 병력이 탐지가 어려운 야간을 틈타 이동해 미 해병 1사단을 포위한 것이다. 해병 1사단은 더는 진격할 수도 후퇴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북풍이 불어오면서 수은주가 낮에는 영하 20~25도, 야간에는 영하 28~45도까지 급강하했다. 칼빈 소총은 혹한에 기름이 얼어 사격할 수가 없었고 경기관총은 추위에 불발이 잦아 2시간마다 대책 없이 사격해 온도를 유지했다. 트럭과 전차는 얼지 않도록 2시간마다 15분씩 가동했다. 휴전용 야전삽으로는 언 땅에 진지 구축이 불가능했다. 전투식량인 C레이션을 난로에 녹이면 아래는 타고 위에는 얼음이 남아있는데 그대로 먹었다가 설사와 복통에 시달렸다. 초기에 하계 전투복으로 작전하던 미 해병대는 추위에 떨었다. 반면 중공군은 솜을 넣어 누빈 겨울 전투복을 갖췄다.
 
전투는 지옥과 다름없었다. 장진호 전투 초반인 11월29일 하갈우리와 남쪽의 고토리 사이는 아수라장이었다. 해병대 부대들은 고립되고 통신조차 두절됐다. 중공군이 일본식 소총과 방망이 수류탄으로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 온통 불바다였다. 전투가 어찌나 치열했던지 훗날 ‘지옥불 계곡’이라 불렀다. 밤엔 추위에 해병대 병사가 참호를 지키다 동사하기도 했다. 수많은 부상자를 차량에 몇겹씩 포개서 후송하는 것은 예사였다. 한국군 통역장교로 해병 1사단에 배속돼 전투에 참전한 이종연(90) 변호사는 “미 해병 부상자를 태운 트럭이 불에 타자 도보로 걷던 해병들이 이들을 끌어내려 대피시키려다 중공군의 총에 맞기도했다”며 “해병들의 전우애가 기억난다”고 했다.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 북한이 미국에 보낸 55구의 미군 유해도 이때 전사한 미군 장병들로 보고 있다.
 
사태가 악화하자 미 10군단장 알몬드 중장은 해병 1사단장 스미스 소장에게 모든 화기를 파괴하고 수송기로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스미스 소장은 거부했다. 수송기로 철수하면 활주로를 지키는 최후의 병력을 사지에 남길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전우를 적진에 두고 오지 않는다는 미 해병 전통에 따른 것이다. 스미스 소장은 “지금부터 우리는 모든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적의 포위망을 돌파해 나갈 것”이라며 “우리는 후퇴가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한다”고 했다. 그러나 아사히신문(1950.12.1)은 “미 해병 고립되다”로 보도했고, 미국에선 “해병사단 전멸” 소문이 나 해병대 가족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같은 시기에 낭림산맥 서쪽도 심각했다. 미 2사단이 평남 군우리 등에서 30일 오전에만 3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이 때문에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원자폭탄 투하를 미 합참에 건의했다가 묵살되기도 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미 해병 1사단은 불굴의 의지로 퇴각에 성공했다. 부상자 4312명과 시신 173구를 후송한 뒤 육로로 철수했다. 전투 결과 해병대 병력 1만5000명 가운데 전사 604명, 실종 192명, 부상  3485명, 비전투 손실 7338명의 피해를 보았다.(일본육전사연구보급회 『한국전쟁』) 동상 환자만 1500여명이었다. 중공군의 피해는 더 심각했다. 전사 2만5000명에 부상자가 1만2500명으로 추산됐다. 이 바람에 중공군 9병단이 거의 와해했다. 중공군 공세에 따라 이듬해 1.4 후퇴 때 유엔군은 한반도를 버리고 제주도로 철수까지 고민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해병 1사단이 9병단의 발목을 잡지 않았다면 미국은 한반도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는 게 전쟁사 전문가들의 얘기다.
 
미 해병이 한국이라는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이처럼 희생을 치른 것은 미 해병 찬가(Marine’s Hymn) 가사처럼 ‘(한국의) 권리와 자유’를 위한 것이다. 북핵이 평화적으로 해결될지는 미지수다. 미국 중간선거(11.6) 뒤 북·미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은 예측불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비핵화를 하지 않으면 대북제재는 풀리지 않는다. 2년 뒤 대선을 준비할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처럼 북한에 강공책으로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면 한반도는 다시 요동칠 것이다. 그럴 때 한국은 핵을 가진 북한에 맞서 우리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68년 전 장진호에서 미 해병이 왜 처절하게 전투했는지 되새겨 봐야 하지 않을까.
 
김민석 군사안보연구소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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