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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회장 생일 여직원만 편지쓰는게 전통이라는 회사

중견기업 A사에 다니는 김모씨(여성)는 매년 창업주인 회장의 생일 때마다 편지를 썼다. 황당한 지시라 생각했지만 “회장님 생신 때마다 여직원들이 편지를 쓰는 것이 오랜 전통”이라는 상사의 말을 거부하기 어려웠다. 김씨는 기자에게 “요즘 잘 안 쓰는 편지를, 그것도 여직원만 편지를 쓰라는 지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익명을 요구한 A기업의 또 다른 직원은 기자에게 올해 초 신년 하례식 때 벌어졌던 일을 전했다. 회장님 앞에서 장기자랑을 하는데 중년의 남성 직원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자신의 배에 '회장님 사랑합니다'는 글자 카드를 붙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직원들은 이런 신년 하례식을 '회장님 앞 재롱잔치'라 부른다"며 "이런 모습이 지나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고 말했다.
  
A사 [사진 A사 직원 제공]

A사 [사진 A사 직원 제공]

최근 직장인 익명 앱 블라인드에 A기업 직원들이 사내에서 겪은 다양한 일들이 논란이 되고 있다. 다른 중소·중견기업에서 근무하는 직원들도 블라인드에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도 A기업과 같은 황당한 지시가 내려지고 있다"며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사태에 이어 사내 '갑질 문화'에 대응하는 직원들의 움직임이 중소·중견기업으로 퍼져가는 양상"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A기업 사태에 대해 국내 중소·중견 기업 경영진들이 경각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변화된 사회와 직원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조직 문화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것이다. A기업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한 직원은 기자에게 "나 정도만 하더라도 옛 문화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젊은 직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직원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회사 측도 최근 “회장님 생신에 감사 인사를 표현한다는 의미가 퇴색된 것 같다”며 “내년부터는 선물과 편지를 정중히 사양한다”는 공문을 내려보내고 제도를 폐지했다. A사 고위 관계자는 "오래전 좋은 뜻으로 시작했고 모든 여성 직원이 다 불만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일부 요구가 있어 내년부터 없애기로 했다"라고 설명했다. 

지난 7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직원들이 서울 종로구 청와대 사랑채 인근에서 열린 '함께 가자 갑질 격파 문화제'에서 "더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며 총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뉴스1]

지난 7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직원들이 서울 종로구 청와대 사랑채 인근에서 열린 '함께 가자 갑질 격파 문화제'에서 "더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며 총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뉴스1]

정준영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매출이 수천억~수조원에 달하는 중견기업 중에도 비상장에다 오너가 소유권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며 "견제할 다른 주주가 없고 언론 등 사회적 감시에서도 벗어나 있다"고 지적했다. 구정우 교수도 "불합리한 기업의 조직 문화는 경영에 최대 리스크가 될 수 있다"며 "중견기업이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변하는 시대상에 맞춰 조직 문화를 바꿔가야 한다"고 말했다. 
 
A사도 변화를 약속했다. A사 관계자는 "해외 기업과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제품의 품질에만 집중하다 보니 내부 조직 문화를 다듬는데 부족한 측면이 있었음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며 "직원들의 요구 사항을 경청하고 조직 문화를 쇄신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 중에 있다"고 말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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