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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 “가난한 나라 과학자는 인생 걸고 조국 잘살게 해야”

김법린 초대 원자력 원장의 지적대로 중국의 첫 노벨상 수상자인 리정다오(李政道·92)와 양전닝(楊振寧·96)은 시카고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에 남았다. 대만으로 옮긴 중화민국에도, 중국 본토에 들어선 중화인민공화국에도 가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미국 과학기술계의 개방적이고 글로벌한 분위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능력만 있으면 출신을 따지지 않고 과학기술자를 우대하는 분위기는 이들의 박사 과정 지도교수들의 삶을 봐도 수 있다. 

정근모, 과학기술이 밥이다 - 제131화(7559)
<11>중국 대약진운동 실패의 교훈
중국, 노벨상 수상자 배출해도 나라는 가난
김법린 원장, "노벨상은 개인의 명예일 뿐"
"국민 잘살게 하는 게 과학기술 책무" 강조
유대인 과학자들, 박해 피해 미국 정착해도
가난한 나라 과학자는 달라야 한다고 당부

1954년 중국에 첫 노벨상을 안긴 물리학자 리정다오(李政道·92)의 시카고대 박사학위 지도교수인 엔리코 페르미(오른쪽)와 부인 라우라.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페르미는 파시스트 정권이 유대인을 탄압하자 유대인인 부인 라우라의 안전을 우려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다. 미국은 찾아온 과학 두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위키피디아]

1954년 중국에 첫 노벨상을 안긴 물리학자 리정다오(李政道·92)의 시카고대 박사학위 지도교수인 엔리코 페르미(오른쪽)와 부인 라우라.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페르미는 파시스트 정권이 유대인을 탄압하자 유대인인 부인 라우라의 안전을 우려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다. 미국은 찾아온 과학 두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위키피디아]

리의 지도교수 엔리코 페르미(1901~1954년)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3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그해 파시스트 정권이 유대인 탄압법을 만들자 유대인 부인을 보호하려고 미국으로 떠났다. 
1957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양전닝(楊振寧·96)의 시카고대 박사학위 지도교수인 에드워드 텔러. 헝가리 유대인으로 독일에서 연구하다 나치의 박해가 시작되자 미국으로 피신했다.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뒤 수소폭탄 개발을 적극적으로 주장해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린다. [위키피디아]

1957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양전닝(楊振寧·96)의 시카고대 박사학위 지도교수인 에드워드 텔러. 헝가리 유대인으로 독일에서 연구하다 나치의 박해가 시작되자 미국으로 피신했다.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뒤 수소폭탄 개발을 적극적으로 주장해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린다. [위키피디아]

 
양의 지도교수 에드워드 텔러(1908~2003년)는 헝가리 유대인으로 독일에서 연구하다 나치 압박에 탈출했다. 두 지도교수 모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그램인 ‘맨해튼 계획’을 이끌었다. 페르미는 ‘원폭 설계자’, 텔러는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린다. 
1921년 광전 효과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은 독일 서남부 울름 출신으로 스위스 연방공대에서 공부한 뒤 스위스 국적도 얻었다. 1933년 반유대주의를 내세운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에서 연구 생활을 계속했다. [중앙포토]

1921년 광전 효과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은 독일 서남부 울름 출신으로 스위스 연방공대에서 공부한 뒤 스위스 국적도 얻었다. 1933년 반유대주의를 내세운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에서 연구 생활을 계속했다. [중앙포토]

 
노벨 물리학상 21년 수상자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년), 54년도에 이를 받게 되는 막스 보른(1882~1970년)도 독일을 떠나 미국에 정착했다. 미국은 난민 과학자들을 받아들여 국력 강화에 활용했다. 
그래도 독일과 이탈리아는 워낙 과학기술 기반이 탄탄했기에 두뇌 유출에도 전후 복구를 빠르게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중화권은 57년 첫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음에도 과학기술과 산업 발달이 뒤지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법린 초대 원자력원장은 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과학기술자의 목표나 임무는 출신 국가에 따라 서로 달라야 한다고 판단했다. 김 원장은 내게 "가난한 나라의 과학기술자는 자신의 지식·경험을 조국의 국민이 잘살게 하는 데 바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노벨상 수상은 개인의 명예 정도로만 여겼다. 아울러 출신 국가 지도자들의 과학기술 인식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김 원장의 생각은 정확했다. 그 뒤 중국 사례가 이를 말해준다. 중국인의 첫 노벨상 수상 이듬해인 58년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년)은 선진국을 따라잡겠다며 농업·공업 분야 대약진운동(58~62년)을 시작했다. 과학기술을 활용한 기계나 동력 대신 인력과 대중동원에 의존해 노동집약적 증산 운동을 펼쳤다. 한 대의 기계가 노동자 100명의 몫을 하게 하는 대신, 노동자 100명을 동원해 한 대의 기계를 대신하는 식이었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당시 중국 지도자들은 현대 과학기술이 경제와 민생에 주는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을 주요 원인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선진국은 일찍이 지도자와 국민이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깨닫고 오랫동안 인재를 키워왔다. 나라가 잘 살려면 과학기술이라는 '비료'가 필수적이라는 김 원장의 혜안은 지금까지도 빛날 뿐 아니라 내 인생의 나침반 역할도 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황수연 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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