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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읽기] 가을의 비옥한 시간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가을이 점점 깊어간다. 하늘은 맑고 높다. 수풀은 마르고, 풀벌레 우는 소리는 쓸쓸하고 가냘프고 애처롭다. 나무 그늘은 한층 선선하다. 코스모스나 구절초꽃 등 가을꽃이 핀 곳엔 가을의 느낌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과일들은 마저 무르익고, 달콤함과 짙은 향기를 완성한다. 나는 시골집에서 호두를 얻어왔다. 또 잘 익은 석류를 몇 개 얻어왔다. 모과도 좀 사서 이 모두를 일상의 탁자에 올려놓고 한동안 바라보려 한다.
 
나는 이즈음 가을의 느낌을 졸시 ‘시월’을 통해 표현했다. “수풀은 매일매일 말라가요 풀벌레 소리도 야위어가요 나뭇잎은 물들어요 마지막 매미는 나무 아래에 떨어져요 나는 그것을 주워들어요 이별은 부서져요 속울음을 울어요 빛의 반지를 벗어놓고서 내가 잡고 있었던 그러나 가늘고 차가워진 당신의 손가락과 비켜간 어제”라고 썼다.
 
가을 시편을 많이 남긴 시인으로는 김현승 시인을 손꼽을 수 있다. 게다가 명편이 많다. ‘가을’이라는 시는 이렇다.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참 멋진 시다. 입술을 다물어 말을 줄이고, 고요하게 내면을 살펴, 별처럼 빛나는 마음의 보석을 만드는 때가 이 가을이라는 뜻이다. 김현승 시인은 가을의 고독을 찬탄한다. 고독은 곧 순금이라고 여겼고, 가을의 끝이 오거든 우리의 영혼은 마지막 빈 가지에 홀로 남아서 까마귀와 더불어 울어야 한다고 노래했을 정도다.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이라고 노래한 시인도 김현승 시인이었다.
 
떠나가는 것을, 마지막 생명의 빛깔을 보여주고 그 화려함을 거두는 것을 우리는 가을의 시간에 마주한다. 사라지고 쇠약해지는 일이 자연의 현상에 그치는 것은 아닐 테다. 사람의 몸도 변해간다. 늙고 병이 오기도 한다. 사람을 잃기도 한다.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도 없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아르헨티나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1955년 국립도서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인생에서 아주 영예로운 순간들이었다. 장서가 가득한 그곳에서 수많은 책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들뜨게 했다. 그러나 이듬해 보르헤스는 시력을 거의 상실하고 만다. 그리고 그는 그 심경을 이렇게 썼다. “여럿인 나, 하나의 그림자인 나,/ 둘 중 누가 이 시를 쓰는 것일까?/ (……)/ 나는 이 정겨운 세상이/ 꿈과 망각을 닮아 모호하고 창백한 재로/ 일그러져 꺼져가는 것을 바라본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고통스런 번민이 담겨 있지만, 몸의 무너짐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마음 또한 담겨 있다. 물론 비탄이 없을 수 없겠지만. 보르헤스는 이러한 변화를 우주의 시간으로 보았고, 이것을 시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낙하하는 것에 빗대었다. “낙하는 결코 멈추지 않지./ 유리가 아닌, 바로 내가 피를 흘리네./ 모래를 옮기는 의식은 무한하며,/ 모래와 함께 우리네 삶도 가네.”라고 노래했다.
 
김현승 시인이 가을의 시간을 깊이를 얻는 시간이라고 한 것처럼 자신의 내부와 연원을 살피는 때가 가을의 시간이기도 하다. 크게 심호흡하듯이 누구나 이 가을에는 자연스레 생각을 깊게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깊은 생각은 종교적인 명상에 이르기도 한다.
 
세계적인 종교학자인 카렌 암스트롱은 한 강연을 통해 종교의 자비로움을 끌어내고 실천해야 한다면서 “자비로운 마음은 스스로 돌아보아 개인이나 사회가 나에게 준 고통을 발견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에게 같은 고통을 주지 않으려는 굳은 마음”이라고 말했는데, 우리의 종교적 명상과 신앙심이 이러한 곳까지 이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가을의 시간은 비옥한 내면의 시간이다. 지혜가 익는 때이다. 성숙해지는 때이다. 따뜻한 차나 커피를 앞에 놓고 마르고 야위어가는 것들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내게 뿌리와도 같은 그 근원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
 
시인 루이 아라공은 시 ‘미래의 노래’에서 인간만이 내일을 위해 살고 미래를 생각해낸다고 보았다. 그는 “살고 살리는 것 중에서 인간만이/ 미래를 생각해낸다/ (……)/ 인간만이 자기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멀리 전방을 내다보는 한 그루의 나무이다”라고 썼다. 이 가을에 우리가 하는 깊은 생각이 전망과 미래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일 것이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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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