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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 폭로에 ‘명예훼손’ …존폐 기로에 선 ‘사실적시 명예훼손’

 존폐 기로에 선 '사실적시 명예훼손'
직장인 박모씨는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아우팅'을 당한 뒤 회사를 그만뒀다. 박씨가 동성애자라는 내용의 글은 사실이었지만 그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회사를 그만뒀고 우울증까지 앓고 있다. [중앙포토, 사진은 기사내용과 관계없음]

직장인 박모씨는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아우팅'을 당한 뒤 회사를 그만뒀다. 박씨가 동성애자라는 내용의 글은 사실이었지만 그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회사를 그만뒀고 우울증까지 앓고 있다. [중앙포토, 사진은 기사내용과 관계없음]

“서대문점 박OO 과장이 게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유독 후배들한테 친절하기로 소문난 사람인데 이런 이유가 있었네요.”
 
지난 2월 말 직장인들의 익명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에 한 유통기업 직원이 이같은 글을 올렸다. 이 기업의 서대문 지점에 근무하는 직원의 성적 지향을 아우팅(동성애자의 성 정체성이 타인에 의해 강제로 공개되는 일)하는 내용이었다.  
 
글은 폭발적인 속도로 퍼져나갔다. 회사 동료들은 “신경 쓰지 말라”고 박씨를 위로하면서도 정말 동성애자가 맞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박씨는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만으로 왜 조리돌림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누군가 아무 생각 없이 올린 글 때문에 극심한 수치심과 명예훼손을 느꼈고 회사 생활조차 정상적으로 할 수 없었다”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우울증이 심해져 지난 5월 회사를 그만둔 상태다.
 
 
형법 제307조에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규정하고 있다. 사실을 적시해 명예를 훼손할 경우 2년 이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국가법령정보센터 캡처]

형법 제307조에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규정하고 있다. 사실을 적시해 명예를 훼손할 경우 2년 이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국가법령정보센터 캡처]

 
현행법에 따르면 박씨는 블라인드 게시판에 글을 쓴 사람을 고소할 수 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규정하는 현행 형법 307조와 정보통신망법 70조에 근거해 형사처벌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르면 내년부터는 박씨의 경우처럼 명예훼손을 당했어도 그 내용이 사실이면 실질적인 처벌이 어렵게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사실적시 명예훼손은 형법 307조에 따라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양형기준서 제외…폐지로 이어질까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달 전체회의를 통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명예훼손 관련 양형기준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으로 심의 의견을 모았다. 양형위는 내년 1월쯤 공청회와 국회에 대한 설득을 거쳐 이르면 내년 3월 중으로 명예훼손죄에 대한 양형기준을 확정할 계획이다. 양형기준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을 넘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자체가 폐지되면, 관련 분쟁은 민사 소송으로만 다툴 수 있게 된다.
 
지난 4월 법률가 330명이 모여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오픈넷]

지난 4월 법률가 330명이 모여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오픈넷]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는 그간 법조계 일각에서 꾸준히 제기했던 요구사항이다. 지난 4월엔 변호사와 교수 등 법률가 330명이 모여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피해자들이 성폭력 등의 피해 사실을 알린 것 자체만으로 오히려 가해자로부터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를 당해 수사 대상자가 되는 위험에 놓이고 있다”며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연극ㆍ뮤지컬 관객들의 집회. [연합뉴스]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연극ㆍ뮤지컬 관객들의 집회. [연합뉴스]

특히 올해 초부터 확대된 ‘미투 운동’의 영향으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화됐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한 성폭력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고발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폭로와 비방의 일상화'…찬반 대립 팽팽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표현의 자유 못지않게 개인의 명예와 존엄성 역시 중요한 헌법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하는 발언을 한다 해도 사실이라는 이유로 이를 처벌할 수 없다면 타인에 대한 폭로와 비방이 일상화할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대법원 양형위의 심의 결정에도 향후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격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서울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낸 김한규 변호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한 영미법계와 달리 우리나라에선 대부분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그쳐 민사 소송을 통한 구제는 실효성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성범죄 피해 사실을 폭로하는 것은 비방의 목적이 없어 정당하다는 대법원 판례까지 있는 상황에서 미투 운동을 이유로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폐지하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판단”이라고 지적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은 범죄로 다뤄야" 
이동원 대법관은 지난 7월 인사청문회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연합뉴스]

이동원 대법관은 지난 7월 인사청문회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연합뉴스]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폐지될 경우 범죄 전력이나 성적 취향 등 개인적 정보가 당사자 동의 없이 외부에 무분별하게 유포되는 문제도 생긴다. 이동원 대법관은 이같은 이유로 지난 7월 인사청문회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당시 이 대법관은 “국민들이 자신의 명예와 사회적 역할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상황”이라며 “사실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길 원하지 않거나, 개인적 문제가 공개적으로 알려지는 걸 국민들이 수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대법원 양형위의 심의 의견과 달리 헌법재판소와 법무부와 역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UN인권위원회와 자유권위원회 등은 수년 전부터 우리나라에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권고했지만 법무부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형사 정책적으로 범죄로 다룰 필요가 있다”고 선을 긋고 있다. 헌법재판소도 역시 2016년 2월 온라인 공간에 사실을 적시해 명예훼손한 경우를 처벌하는 정보통신망법 70조 1항에 대해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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