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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실리적 사대'···명 위신 세워주며 백두산 땅 되찾다

즉위 600년 다시 보는 세종 <상>
세종은 파면 팔수록 새로움이 솟구치는 샘물 같은 존재다. 빼어난 업적이 워낙 많다 보니 그 이면의 고충은 간과되거나, 문화적 의미가 충분히 전파되지 못한 채 사소한 업적으로 치부되는 경우도 있다. 가령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종묘제례악을 지금과 같은 형태로 정비한 이가 세종이다. 세종은 박연을 기용해 새 악기만 만든 게 아니다. 음악계에서는 한국 음악사의 새로운 장을 연 군주로 평가받는다. 세종은 또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는 세제 개편(공법 도입)을 장장 17년에 걸쳐 추진하는 과정에서 17만 명을 여론조사하기도 했다. 21세기 공론조사의 원조는 세종이다. 세종 즉위 600주년을 맞아 3회에 걸쳐 살펴볼, 우리가 몰랐던 세종의 면모다.
 
4군 6진 개척부터가 그렇다. 한반도의 현재 영토를 확정했다는 현대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4군 6진은 한글 창제의 위대함에 빛을 잃는 모양새다. 하지만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 박현모 교수는 “난이도 면에서 가장 어려웠던 업적은 북방영토 개척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초강대국 명의 견제, 실질적인 영토화를 위해 백성들을 대거 이주시킨 과정을 생각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특히 백두산이 4군 6진 개척 과정에서 우리 땅이 됐다. 『세종실록』 14년(1432년) 4월 12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백두산 근처에 한 땅이 있는데, 명나라의 태조 고황제가 고려에 예속시켰다. 내가 『지리지(地理志)』를 보니 한 옛 성의 터가 백두산 앞에 가로놓여 있는데, 이것이 그 땅이 아닌가 의심된다. 마땅히 찾아내어 우리나라의 경계(境界)로 하여야 하겠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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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일대에 대한 분명한 영토 의지를 밝히는 대목이다. 지난달 20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함께 백두산을 등정한 역사적인 장면은, 세종 때문에 가능했던 셈이다.
 
세종대왕은 흔히 문약하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한글 창제 등 문화·과학 분야의 업적이 두드러져서다. 실제로 몸 쓰기를 싫어해 아버지 태종의 걱정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국가의 영토 확보에 관한 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단호한 의지를 표명했다.
 
1423년 만주에서 활동하던 여진족 추장 동맹가첩목아 세력이 명의 압박에 밀려 지금의 함경도, 조선의 동북면으로 침범해 들어왔을 때다. 신하들은 최전방 방어선인 경원부를 한참 후방인 용성으로 후퇴시키자고 건의했다. (그래픽 참조) 지키기 어렵고, 지킨다 해도 실익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세종은 말한다.
 
“정부와 육조는 일찍이 그 고을에 임명되었던 사람과 더불어 의논하여 아뢰어라. 그러나 나의 뜻으로 말하면 퇴축(退縮)은 옳지 않다.”(세종 7년(1425년) 11월 14일)
 
동북면은 호방했던 아버지 태종은 오히려 무리해서 지키려 하지 않았던 곳이다. 1406년 여진족이 침입하자 당시 국왕 태종은 즉각 반격하지만 여진족이 재차 쳐들어온다. 그러자 태종은 경원부를 포기하고 후방인 경성으로 방어선을 후퇴한다. 1417년 태종이 일시적으로 회복한 경원부가 세종 대에 들어 또다시 공격당하자 세종은 방어 의지를 밝힌 것이다.
 
세종이 동북면에 강한 영토 의지를 보인 이유는 뭘까. 이 일대는 풍패지향(豊沛之鄕), 새로운 왕조를 일으킨 제왕(할아버지 이성계)의 고향이었다. 태조는 건국 과정에서 자신의 근거지 주변에 널리 퍼져 살던 여진족의 도움을 받는다. 여진족은 일종의 공신 세력이었다. 이 때문에 태조는 건국 후 발 빠르게 일대에 치소와 역참을 설치해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아들 태종이 아버지 태조를 몰아내고 권좌에 오르면서 조선은 동북면의 여진족과 대립하게 됐지만 한번 영토였던 동북면을 내줄 수 없다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다.
 
“조종께서 지키시던 곳은 비록 한 뼘의 땅이라도 버릴 수 없다(祖宗所守, 雖尺地寸土, 不可棄也).” 세종 19년 8월 6일 기사에 그런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한데 요동, 만주 지역의 여진족을 움직이는 또 하나의 힘은 이웃 명나라였다. 아프리카 원정으로 유명한 명의 3대 영락제가 요동(현재 중국 랴오닝성) 한복판에 군사시설인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해 영향력을 확대하자 여진족은 도미노 현상처럼 압록강·두만강변으로 몰려왔다. 조선은 명에 대한 사대를 자발적으로 선택해 탄생한 나라였다. 내정간섭은 하지 않는 관계였다고 하지만 왕이 바뀌면 승인을 받아야 했고, 해마다 조공을 바쳐야 했다. 세종은 뒷문 바깥에 위치한 격인 조선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명의 은근한 견제 아래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한 것이다. 그런 조선이, 중간의 완충세력인 여진을 치는 일은 자칫 명나라와 일전도 불사하겠다는 각오 없이는 할 수 없는 위태로운 모험이었다.(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세종은 굴욕적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명에 대해 철저한 사대로 일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과 다른 고유의 문자 한글을 만들 정도로 자주적이었던 세종의 지성사대는 고도의 외교술로 봐야 한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이익주 시립대 교수는 “사대로 운신의 폭이 넓어진 역설적인 공간을 활용해 여진족을 몰아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 과정에서 세종은 요동 지역으로 군사를 움직일 때는 반드시 하게 돼 있는 명 황제에 대한 보고 의무를 고의적으로 누락하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계승범 서강대 교수는 “세종 대 조선은 명과의 외교관계만 잘 유지하면 북쪽 국경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을 가졌던 것 같다”며 “실제로 세종 때 다져진 외교 틀을 바탕으로 조선은 임진왜란 전까지 200년 가까이 평화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세종의 외교술을 21세기 한반도 비핵화 국면에서도 참고할 수 있을까.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다. 북한 비핵화가 현 동북아 긴장 상태의 종착점은 아니라고 본다. 요동치는 동북아 정세의 출구일 뿐이다. 결국 진전되는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국방을 튼튼히 하는 게 길이 아니겠냐”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준봉·김호정·노진호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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