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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 구독신청

남북정상회담 '감격' 속에서도 文·참모가 지켜야 했던 것들

뒷맛 개운치 않은 정상회담 말말말
평양 남북 정상회담 합의문이 나온 지 오늘로 딱 2주일이 됐다. 올 들어 벌써 세 번째 남북한 최고 지도자의 만남이지만 평양과 백두산을 무대로 펼쳐진 2박 3일간의 파노라마는 여론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국정 지지율은 회담 이전보다 12.2%포인트 급등해 65%선을 회복(1일 리얼미터 발표)했다. 추석 차례상에 오를뻔한 실업과 경기부진·부동산 등의 이슈는 우선 순위에서 밀려났다. 이쯤이면 문 대통령과 핵심 참모들 사이에서 ‘이 맛에 정상회담 하는 것’이란 말이 나올법하다.
  
남북 정상회담은 성사 자체로 엄청난 폭발력을 갖는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 대면은 ‘역사적’이란 수식어가 절로 붙을 만했다. 그만큼 남북 분단과 대치, 반복과 갈등에서 탈피하려는 국민 염원이 간절하다는 얘기다. 이런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집권세력은 늘 정상회담 카드에 유혹을 느낀다. 천문학적 규모의 불법 대북송금을 마다치 않은 김대중(DJ) 정부, 대선 2개월을 남긴 막판에 대규모 인프라 지원을 합의하는 무리수를 둔 노무현 정부가 그랬다. 김일성 사망으로 정상회담 목전에서 좌절한 김영삼(YS) 대통령은 물론 이명박·박근혜 정부 같은 보수 정권도 정상회담의 마력(魔力)에 빨려든 건 어쩔 수 없었다.
 
지난달 정상회담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본(本) 게임이었다. 앞서 4월 판문점 남측 자유의 집에서, 5월엔 북측 통일각에서 만났지만 삼세번 만에 제대로 된 회담 테이블이 마련된 셈이다. 김 위원장은 5월 북측 지역 회담 때 식사 한끼 문 대통령에게 대접하지 못한 게 영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평양에서 만난 문 대통령에게 자세를 한껏 낮추며 2박 3일간 융숭한 접대를 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김정은 체제 들어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을 맞은 평양은 거대한 세트장을 방불케 했다. 8년 가까운 집권 기간 김정은이 직접 꾸민 공간과 건축물에 대규모 군중 동원이 더해졌다. 첫 대면이 이뤄진 순안공항은 평양의 관문이다. 우리의 지방 도시 버스터미널 수준이던 걸 김 위원장이 증축과 리모델링을 지시해 2015년 7월 개장했다. 외신이 ‘평해튼(평양의 맨해튼)’으로 이름 붙인 대동강변 고층 빌딩과 여명거리 등도 김정은이 공들인 작품이다. 도심 건축물에는 좀체 쓰이지 않는 민트와 핑크빛 페인팅은 이를 조금이라도 더 시각적으로 드러나 보이게 하려는 징표다. 문 대통령 일행이 방문해 만찬을 한 대동강수산물식당도 김정은 지시에 따라 지난 7월 개장한 시설이다. 식탁에 오를 순서를 기다리는 이곳 수족관의 철갑상어는 북한 경제와 민생이 도달하려는 목표와 팍팍한 현실의 괴리를 보여주는 듯하다. ‘일반 주민이 이용하는 평범한 식당’에서의 한 끼를 표방한 청와대의 설명과는 다소 거리가 느껴진다.
 
김정은 위원장은 천연 세트장도 십분 활용했다. 북한 정권이 정통성을 주장하려 차용해온 백두산 정상에 문재인 대통령을 초대한 것이다. 두 정상이 해발 2750m 높이 장군봉에서 손을 맞잡은 장면은 공동선언 서명에 맞먹는 강렬한 이미지다. 평양에서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동선은 판문점 정상회담의 공간적 확장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충분히 활용했다. 총감독은 자신이 맡은 듯했고, 세심한 연출은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동분서주했다.
 
북한이 치밀하게 설정해 놓은 공간과 시간표 속에 들어가 회담하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다. 돌발 상황에다 일방적인 장소·시간 변경이 수시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전면에 등장해야 하는 정상회담의 경우는 더욱 조심스럽다. 무엇보다 경호와 의전이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북측 최고 지도자나 고위 인사가 던지는 말에 임기응변을 발휘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원정 경기를 치러야 하는 이런 어려움을 감안한다 해도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 적지 않다. 정상회담 합의의 감흥과 화려한 카퍼레이드 행렬 등에 묻혀버린 ‘지켜야 할 가치’와 관련한 문제다. 평양 정상회담 첫 회의 테이블에 앉자마자 나온 문 대통령의 모두 발언은 귀를 의심케 했다. “어려운 조건에서 인민의 삶을 향상시킨 김정은 위원장의 리더십에 경의를 표하며 기대하는 바가 크다”는 언급에선 상대방에 대한 인사치레를 넘어선 과잉이 감지된다. 회담 이틀째 저녁 평양 5.1경기장에서 펼쳐진 매스게임 ‘빛나는 조국’ 관람석도 마찬가지다. 문 대통령은 “말로 할 수 없는 감격을 느꼈다”는 소회와 함께 “김 위원장과 북녘 동포들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지 가슴 뜨겁게 보았다”고 밝혔다.
 
정상회담에서 무작정 얼굴 붉히라는 말이 아니다. 폭압적인 70년 노동당 통치와 3대세습의 폐해로 초래된 현실에 눈감지 말라는 주문이다. 정치범 수용소와 대량 아사, 수십만 탈북행렬의 원인 제공자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는 요구다. 유엔이 ‘아동 노동’으로 금지한 집단체조에 강제동원된 어린아이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헤아렸다면 ‘경의’나 ‘감격’ 같은 단어는 소거됐어야 한다. 공동선언 서명 직후 문 대통령이 “그동안 전쟁의 위협과 이념의 대결이 만들어온 특권과 부패, 반인권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사회를 온전히 국민의 나라로 복원할 수 있게 됐다”고 언급한 대목도 적절해 보이진 않는다. 굳이 김정은과 그의 참모들 앞에서 우리 체제 내부의 논쟁적 이슈를 거론할 필요는 없었다는 얘기다.
 
대통령의 말과 표현을 정제하고 다듬는 보좌역할을 했어야 할 참모진은 한술 더 떴다. 문 대통령과 김정은의 백두산행에 동행한 국방 장관은 김 위원장의 한라산 답방이 화제에 오르자 “우리 해병대 1개 연대를 동원해 헬기 패드(착륙장)를 만들겠다”고 나섰다. 후임 장관이 내정돼 임기를 며칠 남겨두지 않은 국방장관은 요즘 유행하는 ‘아무 말하기 대잔치’에 나선 듯했다. “백두산이 화창한 건 김정은 위원장 동지가 오셨기 때문”이라고 면전에서 아부성 발언을 한 김영철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과 견줄 만 하다.
 
안타까운 건 북한 체제의 현실과 동떨어진 부적절한 발언이나 대북 저자세가 인권과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절대시하는 문재인 정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인권 변호사로서의 경륜과 민주화 운동의 열정 등이 융합된 권력이란 자부심이 무색해진다. 2013년 말 방북한 알벡도르지 몽골 대통령은 김일성대 강연에서 “자유를 억압하는 폭정은 영원할 수 없다”고 갈파했다. 그 발언으로 북한과 몽골 관계가 파국을 맞았다는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뒷맛이 개운치 않은 평양 정상회담 기간 중의 말과 화법이 남북관계와 비핵화를 위해 불가피했다는 식의 변명은 꿈도 꾸지 말란 얘기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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