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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미술의 상처

전수경 화가

전수경 화가

가당치 않고 숨이 막힌다. 지난여름 무더위와 싸우며 애써온 영상편집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연말 전시회에 발표할 작품이다. 음향전문가와 함께 이미지를 소리로 전환하고 그 파장을 화면에 표현하는 새로운 작업이다. 그 일을 위해 나는 디지털 매체를 활용하는 몇몇 기술을 배우면서 작품에 적용하는 시도를 해왔었다. 나의 산만함과 무능을 탓해봤자 이제 소용없다. 수단이어야 할 디지털 매체와 컴퓨터가 내 일을 돕기는커녕 지금까지의 공과 미래의 가능성을 망쳐버렸다.
 
나는 물감과 종이로 그리는 전통적 방식을 훈련해왔고 내 삶을 그리는 일로 채워왔다. 그림은 나를 규정하고 구현하는 매체로 믿어왔다. 많은 사람들에게 회화를 보이기 위해 디지털미디어를 실험하는 중이었다. 미래에도 이미지는 여전히 문명을 이끌 것이기에 회화의 아이디어와 디지털미디어가 결합하면 중요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내 작업실이 있는 정릉 산동네는 근린시설이 변변찮다. 메마른 이 동네에 그나마 커피 향을 맡을 수 있고 책을 볼 수 있는 반듯한 공간이 교회이다. 여기서 간간이 사람들을 만나고 식사도 한다. 항상 모노톤의 복장을 한 중년의 남자분을 여기서 만났다. 한 번은 이분이 내가 화가인 것을 알고 “초등학교 때 미술시간이 가장 괴로웠다”며 어려운 지난 시절을 이야기했다. 너무 가난해서 미술시간에 제대로 도구를 갖추지 못했단다. 매번 선생님이 준비물을 체크했고 그럴 때마다 급우들과 격리되어 뒤에 가 서 있는 벌을 받거나 짝의 크레파스를 겨우 빌려 써야 했다고 한다.
 
루소, 잠자는 집시 여인, 캔버스에 유채, 1897,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루소, 잠자는 집시 여인, 캔버스에 유채, 1897,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검정색은 왜 그렇게 빨리 닳는지 그것을 쓸 때마다 더 눈치가 보였다”고 한다. 사물의 테두리를 그리거나 인물의 머리카락, 건물의 지붕을 그릴 일이 많은 아이들 그림에서 검정색은 더 귀하다. 그때 받은 상처 때문인지 그는 지금까지도 컬러풀한 옷을 피하게 된다고 했다. 그의 호소에 나도 공감했다. 12색짜리 크레파스를 준비한 나는 옆자리 친구의 2층짜리 24색 크레파스 앞에 주눅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미술시간은 가진 정도의 차이에서뿐만 아니라 재능의 차이에서도 상처를 준다. “잘한다, 못한다”로 평가받는 표현력과 완성도에 따른 인정은 교실 뒤쪽 게시판에 그림이 걸리게도 하고 대회에 나가 상을 받게도 한다. 예술 중·고등학교를 거쳐 미술대학을 다닌 나로서는 인정의 평가에 항상 포함된 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미술전공자의 경우 치열한 경쟁 속에서, 좌절과 극복의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받은 상처가 더해진다.
 
문제는 미술이 운동 경기나 음악 콩쿠르와 같이 순위를 매기고 공정한 장소에서 평가될 수 없다는 데 있다. 미술 제작을 고취하기 위한 사생대회와 공모전이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수상이 창의와 예술적 성취의 척도는 아니다. 수상자가 이름 없이 사라지고 오히려 낙선자가 미술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인상파 화가들의 예가 그것이다. 시대에 앞서서 상상하고 실험한 전 인생의 실천으로 미술가들은 평가받는다.
 
제도권의 교육 없이 성공한 미술가도 많다. 고갱과 앙리 루소가 여기에 해당한다. 가난한 함석공의 아들로 태어난 루소는 파리시 세관원으로 근무하며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다. 기성 회화의 테크닉에 갇히지 않은 특유의 원시적 화풍이 이국적이다. 어린아이 같은 순진무구한 환상이 이루어낸 그의 참신한 조형과 색채에 20세기 전위 예술가들은 매혹되었고 경의를 표하게 된다.
 
미술은 본래 우리에게 상처 주려 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우리는 가진 것과 재능의 여부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만들어낸 상처 속에 갇힌 것은 아닐까? 다행히 오늘날 초등학교 교과과정은 미술 도구의 질이나 기술적 재능을 요구하지 않는다. 미술이 전인교육의 중요한 방편으로 그리고 분별력 훈련의 매체로 인식된 것에서 비롯된 변화이다. 어릴 때 미술로 상처받은 것이 있다면 이웃 문화센터나 동호회를 찾아보시라. 언제든 어디서든 배우고 발표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전수경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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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