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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인사이트] 도둑과 기생충으로 몰았던 공자를 왜 다시 찾나

시대를 초월한 중국의 지배이론 유교
“도척의 해로움은 한 시대에 그쳤지만, 도둑 공자의 재앙은 만세에 미쳤다(盜蹠之爲害在一時 盜丘之遺禍及萬世).” 20세기 초 5·4 신문화 운동기에 타도공가점(打倒孔家店)의 기치를 이끌었던 오우(吳虞)의 독설이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공자는 지주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봉건 이데올로기의 대표로 폄하됐고 문혁 시기엔 반혁명세력도 모자라 기생충이란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 중국 지도자들은 다시 공자를 찾고 있다. 왜 다시 유교인가?  

탄압 이후 극적 부활 반복한 유교
비판 수용과 내부 성찰이 원동력

유교와 사회주의 결합 시도 속에
자유와 민주의 가치 수용이 과제

세계를 향한 중국의 꿈 이루려면
중화가 아닌 평화부터 추구해야

 
본래 작은 그룹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자(子, 선생)라는 소박한 호칭으로 불렸던 공자는 한나라 이후 지성(至聖)→소왕(素王)→문선왕(文宣王)→대성문선왕(大成文宣王)→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격이 올라갔고 마침내 청나라 강희 연간엔 시대를 초월하는 인류의 스승이란 뜻에서 만세사표(萬世師表)라는 공인된 존칭을 얻었다.
 
그러나 서세동점의 물결이 거세던 19세기를 거쳐 청나라가 망하는 20세기에 접어들어선 도둑으로 추락하며 만악의 근원으로 낙인 찍혔다. 신중국 들어서도 온갖 수모를 당했으니 공자는 이제 종언을 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80년대 들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진행되면서 중국의 지성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당시 대다수 지식인이 가담한 문화 논쟁은 전통문화를 전면적으로 폐기할 것을 주장하는 전반서화파(全盤西化派)와 전통의 재평가를 통해 새로운 중국을 열어야 한다는 유교부흥론이 격렬하게 맞섰다. 그로부터 30여 년, G2 시대가 된 지금 논쟁의 승자는 유교부흥론으로 보인다.
 
기실 ‘탄압 이후의 극적인 부활’이란 이 같은 현상은 유교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제자백가 중 가장 먼저 학문적 세력을 형성했던 유가는 이후 수많은 경쟁자의 도전에 직면했다. 낮은 이들을 향한 사랑이라는 동일한 지평에 서서 유가의 불철저함을 비판했던 묵가가 있었고, 권력의 집중과 통치의 효율을 중시하며 유가의 효제론(孝悌論)을 국가의 통치에 방해가 된다고 비판했던 법가가 있으며, 유가의 인(仁)과 의(義)가 실은 백성의 삶을 노예화하는 차꼬나 칼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던 도가도 있었다.
 
이 사상투쟁은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300여 년 동안 지속하였는데 최후의 승리는 중국을 통일해 제국의 기틀을 다진 진나라의 법가에 돌아갔다. 하지만 진 멸망 이후 들어선 한나라가 선택한 것은 법가가 아닌 유가였다. 제국의 기틀을 다진 것은 법가였지만 제국의 열매를 수확한 주체는 유가였던 것이다.
 
법가의 이론이 권력을 강화하고 단기간에 부국강병을 이루는 데 효과적이란 건 지난 역사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한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는 법가를 버리고 유가를 선택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실마리는 유가의 끊임없는 자기 확장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유가는 외부의 비판을 수용해 자신의 이론을 보완할 뿐 아니라 내부의 자기 성찰적 부정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돌파해왔던 것이다. 이를테면 인(仁)에 대한 묵가의 비판은 맹자의 사단확충론과 예기의 대동사회론으로, 폭력적 이데올로기로 탈바꿈하는 인의에 대한 도가의 비판은 수양론을 강화하는 식으로 대응하면서 외부의 비판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다.
 
각 시대 유학은 앞선 시대의 유학을 비판하거나 계승하기도 하고 다른 사상과의 교류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졌는데 그중에는 도저히 유학으로 보이지 않는 사상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 사상이 유가로 인정받는 건 모두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유가의 근본정신을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의 유가든 타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선 먼저 개인의 수양이 선행돼야 한다는 관점을 지켰다는 점에서 한당유학, 성리학, 양명학, 실학 등은 모두 유가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 유가 전통의 다양성은 한 마디로 도전과 응전의 역사에서 비롯된 결과로 그로 인해 유가는 시대를 초월해 모든 왕조의 지배이론이 됐다.
 
유가는 20세기에 들어 서구 근대라는 미증유의 거센 도전을 이겨내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유가가 근대를 넘어서지 못한 것은 힘의 불균형이 초래한 탓이 크기에, 유가 자체의 한계가 드러난 것으로 결론짓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그것은 최근 중국 지도자들이 다시 유가를 선택하고 있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현재 중국 지도자들은 유교에 내재한 사회주의적 가치를 찾음으로써 유교와 사회주의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겉으로는 공자의 화이부동(和而不同)과 마오쩌둥의 평등이 나란히 놓이게 된 것으로 보이지만 점차 유교의 비중이 커지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낙관은 이르다. 프랑스 혁명 이후 전 세계는 경제적으론 자유시장, 정치적으론 민주주의가 보편 가치로 자리하고 있다. 유교와 사회주의의 결합은 적어도 이 두 가치를 수용하거나 넘어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중국이 과연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지 속단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건륭제 사후(1799년) 내리막길을 걸었던 중국이 굴기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유교가 있다는 점이다.
 
거대 중국의 굴기는 이웃 나라에 위협적으로 보이지만 한국의 경우 상대적으로 대응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은 적어도 500년 이상의 유교 전통을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중국과 유사한 조건에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가장 먼저 이룬 나라로 이른바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에서 유일하게 비중화권 국가다. 한국은 중국이 지향하는 유교 중심의 새로운 체제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문화적,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 유일한 국가인 셈이다.
 
따라서 중국이 아시아에서 새로운 체제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기 위해선 한국과의 관계를 더 높은 수준으로 격상하고 유대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중국의 새로운 체제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나라이며 한국에서 통한다면 세계에서도 통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맹자는 이르길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뜻을 즐기는 일이며 그렇게 할 때 천하를 보존할 수 있다(以大事小者 樂天者也 樂天者保天下)”고 했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존중할 때 비로소 큰 평화가 찾아온다는 뜻이다. 중화가 아닌 평화를 추구할 때 세계를 향한 중국의 꿈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전호근
동아시아 철학을 연구하는 고전인문학자. 16세기 조선 성리학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탁월한 소통력으로 고전 해설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 1300년 한국의 지성사를 정리한 『한국철학사』 등을 펴냈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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