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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우중 산행의 묘미, 지리산 서북능선을 걷다

기자
하만윤 사진 하만윤
[더,오래] 하만윤의 산 100배 즐기기(30)
지리산 서북 능선 바래봉 표지석. 빗속에 홀로 꿋꿋하다. [사진 하만윤]

지리산 서북 능선 바래봉 표지석. 빗속에 홀로 꿋꿋하다. [사진 하만윤]

 
이번엔 지리산 서북 능선이다. 지난해 이맘때 두 차례에 걸쳐 성삼재-중산리 종주 코스를 다녀왔으니 딱 1년 만에 지리산을 다시 찾는다. 서북 능선은 성삼재에서 만복대, 정령치를 지나 바래봉으로 향하는 코스로, 걷는 내내 오른쪽으로 노고단과 반야봉에서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지리산 주 능선이 함께 한다.
 
또, 백두산에서 시작해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일부를 걷는 코스이기도 하다. 지리산을 멀리 백두대간에서 흘러왔다는 의미로 두류산(頭流山)으로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코스 중 팔랑치에서 바래봉으로 가는 곳은 봄철 철쭉 군락지로 유명하다. 물론, 산이 어디 한 철만 편애한 적이 있던가. 가을엔 나름의 멋과 운치가 있으니 함께 하는 이들과 걸음 맞춰 다녀오면 그 또한 즐거울 것이다.
 
이번 산행의 변수는 날씨였다. 출발일인 금요일 저녁부터 비가 예보됐다. 비가 오면 주변 경관을 보는 즐거움이 덜하고 예정보다 산행시간이 길어지며 밥 먹을 장소 또한 마땅치 않을 것이라 내심 걱정이 됐다. 참석 회원들에게 비옷이며 방한 의류 등을 챙길 것을 미리 당부하는데, 이들이 꿋꿋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성삼재 휴게소에 도착해 우중 산행에 만반의 대비를 한다. [사진 하만윤]

성삼재 휴게소에 도착해 우중 산행에 만반의 대비를 한다. [사진 하만윤]

 
서울에서 밤 11시를 조금 넘어 출발한 버스는 부지런히 달려 일행을 성삼재에 내려준다. 새벽어둠에 가랑비까지 흩날리고 있어 휴게소 한편에서 헤드 랜턴을 켜고 비옷을 입는 등 우중 산행에 필요한 준비를 한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가는 반대편 이정표에 만복대로 향하는 탐방로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성삼재에서 만복대로 오르는 코스가 고도 500m가량을 올라야 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라 이번 산행 중 가장 힘이 든다. 인적이 드물어 길이 좁은 데다, 길옆으로 키 높이까지 올라와 비에 한껏 젖은 조릿대며 나뭇잎들을 헤치며 걸으니 금세 옷이며 신발까지 축축해진다. 비 맞은 땅은 또 얼마나 미끄러운지 조심하며 걷다 보니 체력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동이 트기 전 성삼재 방향을 바라보니 일행이 지나온 산 능선이 구름과 안개를 뚫고 잠시 모습을 드러낸다. 안개가 재를 감싸 안은 것인지, 재가 안개를 내뿜는 것인지 알 길이 없어 더 신비로운 풍경에 한동안 넋을 놓는다.
 
만복대에 오르며 바라본 성삼재. 비와 안개를 품어 신비롭게 보인다. [사진 하만윤]

만복대에 오르며 바라본 성삼재. 비와 안개를 품어 신비롭게 보인다. [사진 하만윤]

 
성삼재에서 고리봉과 묘봉치 삼거리를 지나 만복대까지 오르는데 날이 궂고 땅까지 질어 힘이 배로 든다. 더구나 끼니때를 놓쳐 허기가 지는데 마땅히 아침 먹을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없이 일행과 상의해 조금 더 늦더라도 정령치 휴게소에 가서 편히 먹기로 한다. 걷는 내내 빗줄기가 더 굵어지지는 않아 다행이다 싶었는데 정령치 휴게소에 도착하니 그마저도 아예 그쳤다. 덕분에 아침을 편하게 먹었다.
 
정령치에서 바라본 737번 지방도. [사진 하만윤]

정령치에서 바라본 737번 지방도. [사진 하만윤]

 
해발 900m나 되는 곳에 있어 하늘 아래 첫 마을로 불리는 심원마을 옆으로 전라남도 구례군 경계를 지나 737번 지방도를 타고 오르면 남원시 주천면과 산내면 경계를 이루는 정령치가 나타난다. 이곳은 차를 타고 올라 쉴 수 있는 휴게소로는 가장 높은 곳인 해발 1,172m에 자리 잡은, 북으로는 덕유산과 남으로는 지리산을 연결하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이다.
 
이곳에 서면 동쪽으로는 바래봉과 뱀사골계곡이, 서쪽으로는 천왕봉과 세석평전, 반야봉, 남원 시내가 펼친다. 그렇게 지리산 주 능선 1백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임에도 이번엔 궂은 날씨에 한 치 앞도 허락지 않는다. 아쉽긴 해도 어쩌랴,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아침식사 후 정령치에서 바래봉을 향해 가면서. [사진 하만윤]

아침식사 후 정령치에서 바래봉을 향해 가면서. [사진 하만윤]

 
정령치 휴게소에서 조금 늦은 아침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선다. 정령치에서 조금 가다 보면 남원 산내면 덕동리 개령암터 뒤편 절벽에 새겨진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을 만나게 된다. 고려 시대 돋을새김으로 새긴 12구의 불상군이라는데, 오랜 시간 풍화작용 등으로 마모가 심해 크고 선명한 3구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마모가 심해 안타까운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사진 하만윤]

마모가 심해 안타까운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사진 하만윤]

 
다시 길을 잡고 나서 큰고리봉과 세걸산을 지난다. 이후 세동치와 팔랑치를 지나니 바래봉 철쭉 군락지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오랜 산행에 지친 일행 몇은 쉬운 길로 먼저 하산하고 나머지는 늦은 점심을 먹는다. 궂은 날씨에 일부는 서고 일부는 앉고 해서 준비한 음식들로 허기만 가라앉히고 이내 길을 나선다. 예정했던 산행시간을 훌쩍 넘긴 터라 걸음을 더 재촉해본다.
 
바래봉으로 가는 길. [사진 하만윤]

바래봉으로 가는 길. [사진 하만윤]

 
만복대 이후로는 대체로 하산하는 코스이긴 해도 만나는 고개마다 오르막길이 있으니 절대 쉽지 않은 여정이다. 바래봉 정상에서는 구름이 껴 보이지 않는 천왕봉 방향을 바라보며 아쉬움만 안은 채 곧 인월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장마와 태풍으로 하산 길 계단들이 많이 유실돼 미끄럼에 더 주의하며 걷는다.
 
서북 능선에서 만난 들꽃들. 비를 맞아 더 싱그럽다. [사진 하만윤]

서북 능선에서 만난 들꽃들. 비를 맞아 더 싱그럽다. [사진 하만윤]

 
이번 산행에서는 맑은 하늘 아래 탁 트인 풍경에 넋을 놓는 즐거움은 없었다. 대신 짙은 안개와 빗줄기조차 가리지 못한 들꽃들의 싱그러움이 여전하다는 것과, 궂은 날씨에 서로의 힘이 되어 걸음을 맞춘 일행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힘든 여정에도 포기하지 않고 완주한 뿌듯함은 또 어떤가.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롭게 된다’는 지리(智異)산에서 필자는 또 이렇게 한 수 배운다.
 
성삼재-묘봉치-만복대-정령치-고리봉-세걸산-바래봉-덕두산-인월마을. 총 거리 약 24 km, 총 시간 약 14시간. [사진 하만윤]

성삼재-묘봉치-만복대-정령치-고리봉-세걸산-바래봉-덕두산-인월마을. 총 거리 약 24 km, 총 시간 약 14시간. [사진 하만윤]

 
하만윤 7080산처럼 산행대장 roadinm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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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