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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선사 인류의 삶터였던 임진강, 새카만 후손들이 단절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임진강 하면 분단을 떠올리기 쉽다. 실제로 임진강 하류는 강 자체가 군사분계선이다. 그래서 철조망으로 잠겨있다. 한강과 만나는 임진강 최하류, 오두산 통일전망대 앞에서 임진나루까지 37㎞의 철책이다. 지속적으로 개방지역이 넓어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철책 너머 감상으로 만족해야 한다.

 
강물에 발을 담가보려면 좀 더 상류로 올라가야 한다. 연천군 동이리 지역이 최고의 포인트다. 강 북쪽에서 남쪽 주상절리를 바라보며 물놀이와 낚시, 캠핑을 즐길 수 있다. 강변은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널린 자갈밭인데 아이 머리통만한 자갈로 가득하다.
 
이곳을 걸으며 다시 느낀다. 임진강이 분단을 상징한다지만, 남북한이 임진강의 주인 노릇을 한 건 최근의 일일 뿐이라는 것을. 그보다 훨씬 오래전, 국가도 없고 민족도 없던, 그래서 이념도 없고 분단도 없이 오직 ‘생존’만 있던 때부터 임진강은 한반도에 정착한 인간의 삶터가 됐다.
 
그것은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마도 수십만 년 전, 적어도 4만~5만년 전이다. 동북아 일대에 구석기문화가 존재했다는 게 밝혀진 건 겨우 20세기 들어서다. 이전에는 아프리카와 유럽에만 구석기 인류가 살았다는 추측이 많았다. 1918년 중국의 주코덴(周口店) 동굴 유적 발굴로 비로소 동아시아에 전기 구석기 ‘곧선사람(homo erectus)’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이후에도 아시아의 구석기 문화는 유럽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유럽에서 대량으로 발견되는 ‘주먹도끼(handaxe)’와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찍개(chopping tool)’들만 발견됐었기 때문이다. 주먹도끼는 돌의 양쪽 면을 떼어내 날카롭게 만든 도구다. 프랑스 북부 생타슐(St-Acheul)에서 처음 발견돼 ‘아슐리안 주먹도끼’라 이름 붙었다. 이에 비해 찍개는 주로 한쪽 면을 떼어낸 것으로 양면 대칭성이나 정교함이 주먹도끼에 못 미친다.
 
구석기 돌도끼의 재료가 됐을 자갈들이 널린 임진강. 강에 비해 다소 과해보이는 현수교 밑에서 낚시꾼이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고 있다. [이훈범 기자]

구석기 돌도끼의 재료가 됐을 자갈들이 널린 임진강. 강에 비해 다소 과해보이는 현수교 밑에서 낚시꾼이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고 있다. [이훈범 기자]

그런데 1978년 한탄강변에서 동아시아 최초로 주먹도끼가 발견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인도 동쪽으로는 주먹도끼를 만들지 못했다는 ‘모비우스 가설’을 도끼 찍듯 깨버린 것이다. 알고 보니 주먹도끼는 임진강과 한탄강 일대에서 흔한 도구였다. 거의 전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주먹도끼가 발견된다. 현재 조사 중인 곳만 30곳에 달한다.
 
주먹도끼를 처음 발견해 우리 조상들의 체면을 세워준 사람이 주한미군이었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동두천에서 근무하던 공군 병사였는데 여자친구와 한탄강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고고학을 전공했기에 모난 돌 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던 것인데, 어쨌거나 분단과 구석기가 이어지는 절묘한 지점이다.
 
강변의 조약돌을 깨서 도구를 만들던 인류의 후손들은 그 자리에 커다란 돌을 옮겨다 고인돌을 만들었다. 청동기 시대의 흔적이다. 임진강을 끼고 있는 파주 일대에만 100기가 넘었다는데 지금은 20여 기가 남아있다. 이후 고대국가 시기의 사람들은 이곳에 돌무지 무덤을 만들었다. 백제 초기의 것으로 알려진 돌무지 무덤이 연천 상곶리에 오롯이 남아 있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구릉에 강가에서 날라왔을 30~50㎝ 크기의 돌들을 쌓아 쌍분(雙墳)을 만들었다. 아마도 지방 토호 부부의 무덤일 터다. 전국적으로 2만여 기에 달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우리의 고인돌과는 달리, 이런 적석총은 보기 드문 것이다.
 
임진강 주변에는 신라인의 무덤도 있는데,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것이다. “천년 사직을 가벼이 넘겨줄 수 없다”는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와 함께 나라를 왕건에게 바친 비운의 왕이다. 옥황상제의 하사품으로 고구려의 침범까지 막았다는 옥대라고 『삼국유사』는 전하지만, 힘없는 나라는 그런 보물조차 지킬 수 없는 법이다. “백성들을 더 이상 희생시킬 수 없다”던 경순왕이 서럽지만 현명하다. 베를린 시민들의 희생은 아랑곳없이 참모들의 항복 권유를 끝까지 거부했던 히틀러와 다르다.
 
“왕의 영구는 도성 100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원칙에 임진강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 경주를 벗어나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 됐다. 개성과 같은 위도인 연천군 장단면에 안장됐다. 신라의 옛 수도 경주에서 마지막 왕의 장례가 치러질 때 동요할 수 있는 민심을 고려 왕실이 우려했을 게 분명하다.
 
타향 땅 전조(前朝)의 왕릉을 누가 돌보랴. 800년간이나 잊히다가 조선 영조 때 발견된 비에서 “시호 경순왕을 왕의 예우로 장단 옛 고을 남쪽 8리에 장사 지내다”라는 명문을 읽어 다시 찾았다. 그래서 복원됐는데 신라 것도, 고려 것도 아니다. 곡장과 호석, 석등, 망주석 모양이 조선 양식 그대로다. 모든 것을 잃은 왕이 남의 땅에서 남의 옷을 입고 애섧게 임진강 하구를 굽어보고 있는 것이다.
 
산 사람이 있기에 죽은 사람이 있듯, 무덤은 곧 삶을 의미한다. 이후로도 임진강 일대에서 삶은 이어졌다. 특히 연천 고랑포는 6·25 전까지 임진강 수운(水運)의 종점이자 최대의 항구로 번창하던 곳이다. 대형 황포돛배가 서울 마포와 강화도를 오가며 임진강 유역의 농산물과 생선을 실어 날랐다. 고랑포에 옛 화신백화점 분점까지 있었다니 번성의 정도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전국에 350개 분점이 있었다니 큰 규모는 아니었겠지만, 오늘날 고랑포의 모습으로는 그것조차 상상하기 쉽지 않다. 지금은 어선 한 척 댈 수 없는 개울이 됐고, 영업을 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없는 매운탕집들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군사분계선 북쪽 북한의 황강댐과 이에 맞선 분계선 남쪽 남한의 군남댐이 강물의 유속을 늦춰 토사가 쌓인 탓이다. 분단이 강물마저 끊을 참인 것이다. 세 번이나 만난 남북 정상들의 대화가 장애물들을 없애 임진강을 예전처럼 힘차게 흐르게 만들 수 있을까. 강물은 그저 무심하게 흐를 뿐이다.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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