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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 "美, 원전설계도 먹칠후 줘···70년대 울분이 한국원전 낳았다"

두 차례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낸 정근모(79) 박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과학자이자 과학기술 행정가다. 만 23년5개월이던 1963년 2월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응용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1세대 과학자로, 한국인 해외 최연소 박사학위 취득의 기록을 세웠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고등과학원(KIAS) 설립을 제안하고 한국형 원자로 개발에 앞장서면서 이 땅에서 과학기술이 자립의 터전을 잡는 데 기여했다. 과학기술은 가난 탈출과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됐다. 중앙일보 장수 연재물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그의 삶을 살펴보는 새 연재를 시작한다. ‘과학기술이 경제 엔진’이라는 제목처럼 과학기술을 통한 경제 발전과 에너지 자립의 과정을 살펴본다. 현재 KAIST 과학정책대학원 석좌교수인 그의 증언으로 ‘과학입국’의 숨은 역사를 새롭게 발굴하고 반추할 예정이다. 그의 인생철학과 공개할 사연들을 미리 들어봤다.
 
정근모 박사는 1950년대 물리학을 전공한 1세대 과학자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설립과 한국형 원자로 개발을 주창했던 그는 우리가 경제 부흥과 사회 안정을 이룬 핵심 동력이 과학기술 발전이라고 믿는다. 특히 에너지 기술의 자립은 우리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계기로 평가한다. [임현동 기자]

정근모 박사는 1950년대 물리학을 전공한 1세대 과학자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설립과 한국형 원자로 개발을 주창했던 그는 우리가 경제 부흥과 사회 안정을 이룬 핵심 동력이 과학기술 발전이라고 믿는다. 특히 에너지 기술의 자립은 우리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계기로 평가한다. [임현동 기자]

과학자와 과학·기술 행정가로서 그간 걸어온 길을 정리하면.
“지금 생각하면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마치 어떤 분이 예정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해온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에너지 분야와 KAIST, 그리고 연구개발(R&D) 시스템 혁신이다.”
 
에너지 분야에선 어떤 일을 했나.
“분자 에너지 구조론으로 55년 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원자력 에너지 분야를 계속 연구했다. 그 뒤 한국에서 원자력발전소 기술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에너지 자립에 기여한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특히 80년대 ‘한국형 원자로’ 개발을 주장해 엔지니어들과 함께 이를 이룬 것은 일생의 보람이다. 이를 통해 한국은 세계적인 원자력 기술 강국으로 떠오르고 에너지 자립에도 한걸음 더 다가서게 됐다.”
 
한국 원자력 산업에 기여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됐나.
“사실 한국의 역대 지도자는 정권과 상관없이 원자력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 68년 경제성장을 위한 전력 확보를 위해 원전 건설을 결정했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아무런 기술도 없었다. 원전 건설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삽질과 부지에 흙을 나르는 일밖에 없었다. 과학기술자들을 미국의 아르곤 국립연구소 등 해외에 보내 훈련했지만 기술 획득은 쉽지 않았다. 결국 78년 고리 원전을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건설했는데, 우리는 설계와 건설 과정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완공 상태에서 열쇠만 받아서 돌렸다. 당시 우리가 받아본 설계도면은 상당수 새까맣게 칠해져 있었다. 기술 노하우라서 알려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돈도, 기술도, 인재도 없었다. 과학기술자들은 울분에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기술종속의 어두운 시대였다. 그래서 나서게 됐다.”
 
어떻게 대응했나.
“70년대 KAIST의 전신인 한국과학원(KAIS)에 과학기술사회 연구실을 만들어 활동했다. 그때 "경제발전을 위해선 시장과 연결되는 엔지니어링, 즉 공학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여럿 발표했다. 그중 하나가 에너지 분야였다. 73년 중동전쟁에 이은 석유 파동으로 에너지 수급이 국가적 과제로 떠올랐다. 그래서 에너지 자립 수단의 하나로 원전 건설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우리 손으로 원전을 설계하고 건설해 운용하는 기술을 터득하지 않으면 에너지 자립과 안전 기술 확보가 힘들다고 강조했다. 다행히 원전을 계속 건설한 덕분에 엔지니어들은 현장에서 경험을 쌓았고, 원전 기술 자립을 이뤄야 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기술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과거 시커멓게 먹으로 칠했던 원전 전체 도면을 비로소 볼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우리 손으로 한국형 원자로를 새롭게 설계까지 할 수 있게 됐다. 꿈의 기술을 우리 것으로 만든, 기술 자립의 순간이었다.”
 
그 성과를 어떻게 평가하나.
“세계 엔지니어링 역사에서 보기 드문 감동 사례다. 그 결과 100만㎾급 한국형 표준원자로인 OPR-1000과 140만㎾급 한국형 신형 경수로 APR-1400에 이어 150만㎾급 차세대 신형원전 ‘APR+’까지 개발했다. 전 세계 원전 기술을 한국이 이끄는 수준에 이르렀다. 원전 기술 자립은 한국 경제와 에너지 역사는 물론 과학기술사에서도 우리 세대의 업적으로 기록돼야 할 정도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아랍에미리트(UAE)에 원전 수출까지 한 경이로운 과정의 숨은 역사는 앞으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하면서 상세하게 밝히겠다.”
 
정근모 박사 인터뷰가 5일 서울 여의도 교육시설 공제회관 사무실에서 열렸다. [임현동 기자]

정근모 박사 인터뷰가 5일 서울 여의도 교육시설 공제회관 사무실에서 열렸다. [임현동 기자]

KAIST(71년 설립 당시 명칭은 한국과학원(KAIS)) 탄생에도 힘을 보탰다.
“인생의 상당 부분을 거기에 쏟았다. 일생의 보람이다. 70년 3월 24일 귀국해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두뇌 유출을 막으려면 과학기술 전문 연구·교육 기관을 세워야 한다는 내용의 브리핑을 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과학기술로 경제를 일으키고 싶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문제는 4월 6일 경제과학심의위원회에서 문교부가 설립에 반대한 것이다. 그러자 남덕우(1924~2013년, 69~74년 재무부 장관, 74~78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80~82년 총리) 당시 재무부 장관이 나서서 문교부 사업 대신 과학기술처가 경제 프로젝트의 하나로서 설립하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다시 미국에 갔다가 7월 17일 미국 국제개발처(USAID)의 600만 달러 지원을 위한 타당성 조사단과 함께 귀국하니 이미 그 전날에 국회가 KAIS 설립을 위한 법까지 통과시켜 놓고 있었다. 한국이 먼저 과학기술 입국의 의지를 보인 셈이다. 이에 당시 조사단장이던 프레더릭 터먼(1900~82) 스탠퍼드대 부총장은 긍정적 보고서를 USAID에 내고 600만 달러 원조를 공식화했다. KAIST의 출생 증명서가 된 ‘터먼 보고서’다. 터먼은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로 통하는 혁신적 인물이다. KAIST는 USAID에서도 성공신화로 통한다. 그 진짜 원동력은 한국에서 찾아야 한다. 과학기술 입국을 위한 지도자의 의지와 행정 각료의 지혜, 그리고 국회의 신속한 입법이 그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만 돕는다.”
 
KAIST가 한국 경제발전에  미친 영향을 어떻게 보나.
“수많은 석·박사를 배출해 과학기술 입국을 이끌었다. 요즘 반도체 수출이 한국 경제를 이끄는데, 그 힘은 오랜 과학기술 교육과 연구에서 나왔다고 본다. 일례로 삼성전자 권오현 회장이 KAIST 전기공학 석사, 세계적 수준의 시스템 반도체와 메모리 디바이스 기술 개발에 앞장선 정칠희 삼성종합연구원장이 물리학 석사 출신이다.”
 
KAIST뿐 아니라 고등과학원(KIAS) 설립도 주도했다.
“고등과학원은 96년 10월 기초과학 전문 연구기관으론 한국 최초로 설립됐다. 최고 과학자들이 모인 싱크탱크다. 그 꿈은 60년대 미 프린스턴대에서 핵융합을 연구할 때 시작됐다. 당시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67)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장이 기초 과학자들을 모아 연구하고 토론하는 현장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면서 기초과학의 심오한 세계에 감동했다. 두 번째 과기처 장관을 맡았을 때 ‘한국에 천연자원은 없지만 두뇌 자원은 있으니 이를 활용해 과학기술을 통한 고도 경제발전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고등과학원을 설립했다. 우리가 그동안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사실 다른 나라의 과학 성과를 빌리고 남의 기술로만 하다 보니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과학기술을 자립하고 창의적 연구로 새 도약을 이루려면 이런 기초과학 연구기관이 필요하다.”
 
과학기술 연구 시스템을 확립하고 효율적인 연구 지원 시스템 도입에도 노력했다.
“과학재단 이사장과 과기처 장관으로 일하면서 R&D의 기반이 되는 과학기술 연구센터를 이 땅에 정착시킨 것은 큰 보람이다. 당시 과학과 엔지니어링 연구센터를 13개 만들었는데 지금은 전국에 100개가 넘는다. 이들은 지금 과학기술 자립의 바탕이 되고 있다. 다른 나라 연구 결과를 가르치는 데 치중했던 대학이 이젠 연구 현장으로 바뀌었다.”
 
청년 과학기술자·과학도와 정부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과학기술은 청년세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 청년들이 과학기술을 통해 자기 뜻을 펴고 우리 공동체를 번영하게 하는 데 기여할 기회를 주는 것은 정부의 책무다. 이를 위해 안보·안전은 물론 일자리·복지를 위한 과학기술 개발을 통해 새로운 과학입국의 길로 나가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야 한다. 독일·중국 등이 이미 하고 있는 정책이다. 로봇·인공지능(AI)·빅데이터 등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는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줄 것이다. 대한민국은 과학기술로 일어선 나라임을 잊어선 안 된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과학기술의 불씨를 새롭게 되살려야 경제가 살고 일자리를 만들며 나라에 활기가 돈다. 현재 활동 중인 과학기술자들에겐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과학기술’이란 개념을 다시 한번 새롭게 정립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정근모 박사가 걸어온 길
1954~55 경기고 1년 수료
 55~59 서울대 물리학과 이학사
 59~60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60~63 미국 미시간주립대 이학박사(응용물리학)
 64~66 미 프린스턴대 핵융합 포스트닥 과정 수료
 63~66 미 플로리다대 물리학과 조교수
 66~67 미 MIT대 핵공학과 연구교수
 67~71 미 뉴욕공대 전기물리학과 부교수
 71~75 한국과학원(KAIS) 설립 제안,
초대 부원장 및 전기 및 전자공학과 교수
 75~85 미국 뉴욕공대 핵공학과 및 전기공학과 교수,
플라스마 연구소 소장
 82~86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 사장
  87-2000, 2012~현재 아주대 에너지학과 석좌교수, 에너지연구소장, 초빙석학교수
 88~90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89~90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 의장
 90, 94~96 과학기술처 장관 (12대 및 15대)
 92~93, 96~97 원자력협력담당 대사
 92~94, 98 고등기술연구원 1, 2대 원장
 98~현재 미 공학한림원 외국인회원
2000~2004 호서대 총장
2004~2007 명지대 총장
2004~2007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
2004~현재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회장, 고문
2010~2013 한국전력 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
(KINGS) 설립추진위원장, 국제자문위원장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황수연 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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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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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