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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저녁하늘 같은 현(絃)

WITH 樂: 브람스 현악육중주 1번
아마데우스 사중주단의 브람스 현악육중주 음반

아마데우스 사중주단의 브람스 현악육중주 음반

S형은 직장 상사였다. 친근한 얼굴, 둥근 안경, 하얀색 남방과 청바지, 부드러운 목소리. 그는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이었고 타인에게도 그러했다. 잘 어울려 놀던 시간이 흐르고 어느 가을날, “나랑 조직생활은 맞지 않는 것 같다”며 회사를 그만 두었다. 그가 사라지자 회사는 재미없어지기 시작했다. 
 
한 해 뒤 그를 만나러 갔다. 저녁때 보기로 했지만 새로 시작한 일 때문에 약속 시간은 자꾸 미뤄졌다. “그러지 말고, 우리 집이 경춘선 기차 타고 40분쯤 가면 되는데 같이 갔다가 내일 아침 함께 나오자.”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제안에 그러자고 했다. 우리는 밤 10시가 다 되어 청량리역에서 만났다. 창 밖은 캄캄했다. S형은 가는 내내 “집이 좀 불편해도 뭐라 하지마”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그의 집은 전형적인 시골집이었다. 원래 화가가 화실로 쓰던 집이라 했다. 대문 옆에 광이랑 외양간이 있고 마당에는 작은 평상도 하나 있었다. 오랜만에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사랑채에는 피아노랑 책이 가득했다. 사람 하나 누우면 남는 공간도 없는 작은 방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개구리 소리와 방에서 나는 책 향기가 좋았다. 한밤의 공기는 달콤했다. 안채에서 S형이 물었다. “거기 불편하지 않니?”  
 
나는 “아니요”라고 답하면서 평상으로 나왔다. 잠들지 않고 있던 형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편해서 못 주무시고 나오시는 거예요.”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형! 이 집 너무 좋네요. 별빛 보는 게 얼마 만인지 설레서 잠이 오지 않아요.” 그가 말했다. “네가 그걸 좋게 봐서 좋은 거지. 나도 여기가 나쁘진 않아.”  
 
그날 밤 나는 별빛이 연주하는 실내악을 들었다. 함께 놀던 시절, 그에게 음악을 권해 달라고 한 적이 있다. “가을 저녁 초승달 아래서 들으면 좋은 음악이 뭐가 있을까요?”그는 단번에 대답했다. “브람스 현악육중주 1번.”  
 
가을 남자 브람스는 스승의 부인이었던 클라라 슈만을 사랑했다. 하지만 어찌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슈만이 죽고 난 뒤에도 둘의 관계는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 평생 믿음직한 친구이자 음악적 동지로 서로를 아끼며 살았다. 현악육중주 1번은 청년시절 작곡했다. 당시 교제했던 아가테라는 가수와 관계가 있다고도 하지만, 나는 오히려 클라라와 더불어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브람스가 차마 다 하지 못한 말이 이 음악인 것 같다.  
 
특히 ‘테마와 변주’라고 불리는 느린 2악장이 그렇다. 이 곡은 브람스가 클라라를 위해 피아노 버전으로도 만들었는데 내 상상의 알리바이는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첫 번째 주제는 바이올린 없이 두 대의 첼로와 비올라만으로 시작한다. 가을 저녁하늘 같은 도입부다. 나는 이 대목에서 클라라의 임종을 바라보는 브람스를 본다. 클라라의 회한이 첼로와 비올라의 선율을 따라 낮게 흐른다. 한동안 묵묵히 나무의자에 앉아 있던 브람스가 바이올린을 들고 이 주제를 눈물로 반복한다. 실제 브람스는 클라라의 임종을 지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내 상상 속에서 두 사람은 마지막 인사를 한다. 곡이 끝날 즈음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말한다. “내 삶의 가장 아름다운 체험이요, 위대한 자산이요, 고귀한 의미였던 클라라, 잘 가요.”  
 
평소 손이 자주 가는 음반은 아마데우스 사중주단과 친구들의 1966년 녹음이다. 들을 때마다 2악장에서 조금만 더 느렸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선이 살아 있고 꿈틀거리는 생명력은 따라올 연주가 없다. 20세기 중반 최고의 사중주단답게 격조 있는 분위기와 표현의 농밀함은 명불허전이다. 진부하긴 하지만 역시 찬바람이 불면 브람스다.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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