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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트렌드] 쓸모없어져 발길 끊긴 곳, 문화의 옷 입고 눈길 끌다

공간 업사이클링 폐허가 된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개조한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 버려진 탄광 일대를 문화·레저 시설로 활용한 독일 에센의 졸페라인, 낡은 고가 철도를 철거하는 대신 공원으로 조성한 미국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 모두 도시재생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방치된 산업 시설이 문화와 예술을 덧입은 복합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해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국내에서도 도시재생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옛 공간의 정체성은 살리고 새로운 가치를 더한 공간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방치된 폐수 처리장은 문화 공간으로, 버려진 카세트테이프 공장은 예술공장으로 변신했다. 쓰임을 다해 버려진 공간을 재해석한 ‘공간 업사이클링(up-cycling)’을 소개한다. 
서울시는 산업화 시대 유산인 석유비축기지의 탱크와 옹벽 등을 그대로 살려 ‘문화비축기지’를 조성했다.

서울시는 산업화 시대 유산인 석유비축기지의 탱크와 옹벽 등을 그대로 살려 ‘문화비축기지’를 조성했다.

 

석유비축기지·폐수처리장
스토리 담은 문화공간 변신
10여 년 만에 시민 곁으로

서울 지하철 6호선 상암월드컵경기장역을 나와 서문 방향으로 걷다 보면 매봉산 자락 아래 거대한 원형 구조물이 자태를 드러낸다. 울창한 수풀 아래 녹슨 철제 탱크와 낡은 콘크리트 벽이 고층 빌딩과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서울시는 산업화 시대 유산인 석유비축기지의 탱크와 옹벽 등을 그대로 살려 ‘문화비축기지’를 조성했다.

서울시는 산업화 시대 유산인 석유비축기지의 탱크와 옹벽 등을 그대로 살려 ‘문화비축기지’를 조성했다.

 
이곳은 본래 산업화 시대 석유파동에 대비해 만든 석유비축기지였다. 1976년 건설 당시부터 1급 보안시설로 지정돼 일반인의 접근이 철저히 통제됐던 곳이다. 인근에 상암월드컵경기장을 조성하면서 위험시설로 분류돼 2000년 11월 폐쇄된 이후 10년 넘게 방치돼왔다. 그러다 지난해 ‘문화비축기지’란 이름으로 시민의 품에 돌아왔다. 서울시는 유류를 저장하던 탱크와 송유관, 옹벽 등을 최대한 살려 문화공원을 조성했다. 축구장 22개와 맞먹는 규모의 14만22㎡ 부지 한가운데 넓은 야외 마당이 자리하고, 그 주변으로 공연장·전시 공간, 커뮤니센터 등으로 쓰이는 6개의 탱크(T1~T6)가 에워싸고 있는 형태다. 이곳에선 주말마다 공연·축제·전시·마켓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이광준 문화비축기지 기지장은 “기존 자원을 재활용해 만든 문화비축기지는 ‘서울로 7017’과 함께 대표적인 서울의 도시재생 랜드마크로 꼽힌다”며 “기지 내 주요 공간별 특성에 맞는 예술가와 협업해 전시나 공연 등 시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산업화 시대 유산인 석유비축기지의 탱크와 옹벽 등을 그대로 살려 ‘문화비축기지’를 조성했다.

서울시는 산업화 시대 유산인 석유비축기지의 탱크와 옹벽 등을 그대로 살려 ‘문화비축기지’를 조성했다.

 

전국 곳곳 공공 건축물 업사이클링
방치된 카세트테이프 공장을 재생한 전북 전주의 ‘팔복예술공장’.

방치된 카세트테이프 공장을 재생한 전북 전주의 ‘팔복예술공장’.

낡은 건축물의 원형을 살린 ‘공간 업사이클링’이 도시재생이나 건축 분야에서 중요한 트렌드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업사이클링은 ‘업그레이드’(upgrade)와 ‘리사이클링’(recycling)의 합성어다. 버려진 제품을 단순히 재활용하는 차원을 넘어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

 
의류나 가구, 생활용품 등에서 주를 이뤘던 업사이클링이 건축물과 공간으로 확장되는 추세다. 전국 곳곳에서 공공 주도의 업사이클링 사업이 추진 중이다.
 
경기도 수원에서는 10여 년간 방치됐던 고색동 수원산업단지 폐수 처리장이 복합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지난해 11월 문을 연 ‘고색 뉴지엄’은 산업단지 근로자와 지역 주민, 예술인이 함께하는 문화 향유 공간이 됐다.
 
전북 전주에서는 오랫동안 방치된 카세트테이프 공장이 지난 3월 ‘팔복예술공장’으로 부활했다. 전주시와 전주문화재단이 91년 문을 닫은 카세트테이프 공장을 예술가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것. 녹슬고 빛 바랜 건물 외벽에 철골 구조물을 덧대 옛 공장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제주에서는 버려진 병원 건물이 문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2009년 제주대병원이 이전하면서 남겨진 건물을 제주시와 제주문화예술재단이 리모델링한 것이다. 지난해 5월 문을 연 ‘예술공간 이아’는 제주도민에게는 문화 향유의 기회로, 여행자에겐 제주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오래된 목욕탕에서 문화예술 공간으로 변신한 서울 아현동 ‘행화탕’.

오래된 목욕탕에서 문화예술 공간으로 변신한 서울 아현동 ‘행화탕’.

 
복합문화 공간뿐 아니라 상업시설에도 업사이클링이 활발하다. 오래된 창고나 공장, 목욕탕 등을 개조해 카페나 쇼핑 공간 등으로 바꾸는 식이다. 서울 성수동의 ‘대림창고’, 합정동의 ‘앤트러사이트’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버려진 창고와 신발공장이 감각적인 카페로 변신해 젊은 층이 많이 찾는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서울 아현동의 오래된 동네 목욕탕도 명소가 됐다. 낡은 굴뚝과 욕탕, 깨진 타일 등 옛 목욕탕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행화탕’을 카페 겸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덕분이다.
 
아모레퍼시픽의 화장품 브랜드 이니스프리는 지난해 서울 소격동에 한옥 두 채를 연결한 ‘공병공간’을 만들었다. 자원 순환의 가치를 전달하기 위해 이 건물에는 화장품 공병 23만 개가 마감재로 사용됐다. 매장에는 공병 파쇄기를 비치해 소비자가 파쇄 과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현대적 분위기서 만끽하는 옛 정서
패션기업 세정은 경기도 용인의 낡은 물류창고를 개조해 복합쇼핑 공간 ‘동춘 175’를 선보였다.

패션기업 세정은 경기도 용인의 낡은 물류창고를 개조해 복합쇼핑 공간 ‘동춘 175’를 선보였다.

최근엔 패션기업 세정이 74년부터 1호 물류센터로 사용했던 경기도 용인의 물류창고를 개조해 ‘동춘175’를 오픈했다. 기존 건물을 다 허물지 않고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통해 쇼핑과 휴식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과거 생산 현장의 핵심 설비였던 의류제조 기기를 예술작품처럼 곳곳에 전시한 것이 특징이다. 박이라 세정그룹 부사장은 “회사의 역사가 녹아 있는 이곳의 가치는 지키되 최신 라이프스타일을 접목한 감각적인 공간으로 변화시켰다”고 전했다.

 
이처럼 공간 업사이클링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개성 있는 공간을 선호하는 사람이 늘면서 오히려 낡은 공간에 매력을 느끼는 것으로 분석한다. 현대인에게 옛 정서를 살린 디자인이나 인테리어가 신선한 ‘콘셉트’가 된다는 것이다. 김태환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최근 발표한 ‘버려진 공간의 재발견, 공간 업사이클링’이라는 보고서에서 “방치된 창고나 공장, 오래된 목욕탕, 전통 가옥 등을 문화 공간이나 카페, 쇼룸과 게스트하우스 등으로 활용한 사례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언론을 통해 소개되면서 공간 업사이클링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다”고 분석했다.
공병 파쇄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이니스프리의 ‘공병공간’. 

공병 파쇄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이니스프리의 ‘공병공간’. 

 
하지만 비슷한 형태의 공간 업사이클링이 늘면서 개성 있는 공간으로서의 경쟁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이재수 강원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과거 성장 시대에 재건축·재개발로 철거됐던 공간이 성숙 시대가 되면서 ‘재생’이란 콘셉트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며 “근대 문화유산이나 산업화 시대 시설 같은 유형의 자산뿐 아니라 지역공동체 등 무형의 자산도 보존해 지속 가능한 도시재생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한진 기자 jinnylamp@joongang.co.kr, 사진=프리랜서 김동하, 각 업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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