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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의 시시각각] 무기 녹여 쟁기 만드는 신화 현실로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북한 관계든 북·미 관계든 ‘북한 비핵화’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의미 있는 한 걸음을 옮길 수 없다. 전진하는 듯해도 순식간에 원점으로 후퇴하기 일쑤다. 이 엄연한 사실을 분칠하거나 우회하는 시도는 가짜일 가능성이 많다. 김정은으로부터 믿을 만한 비핵화 행동을 확인하지 못한 채 ‘남북 군축’이니 ‘경제 지원’이니 ‘판문점 선언 국회 비준’ 같은 이벤트가 마구 쏟아지면 국내 저항으로 정권에 위기가 닥칠 수 있다.
 
내일 평양을 방문하는 문재인 대통령도 비핵화의 엄중함을 알고 있다. “북한은 현재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 핵물질, 핵시설, 핵프로그램을 폐기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13일 청와대, 정상회담 원로자문단과의 오찬에서)”는 발언에서 분위기가 느껴진다. 문 대통령이 김정은 앞에서 그의 눈을 응시하며 이 요구를 한다면 국민 신뢰가 높아질 것이다.
 
문 대통령은 “북한은 비핵화를 하고, 미국은 체제보장을 해 주겠다고 한다. 다만 상대에게 먼저 하라고 하는 것이니 충분히 접점을 찾을 수 있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선후(先後) 관계가 접점을 찾기 더 어려운 법이다. 여기서 선후는 마음 좋은 사람이 선의(善意)로 양보해 주는 버스 줄서기와 다르다. 이 문제는 북한과 미국 공히 수십 년간 축적한 정치 공동체의 가치, 내재적 질서를 다 걸고 결행하는 운명적인 선택이다. 만일 북·미 간 접점 도출에 실패해 빈손으로 내려오면 당장 우리 국민부터 문 대통령에게 말의 책임을 물을 것이다.
 
답이 없는 건 아니다. 대안이 있다. 버스 앞에 일렬로 서는 줄이 아니라 트럭 뒤칸에 함께 물건을 싣고 올라타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한국과 북한, 미국 3국이 공동으로 북한 영변의 핵무기 생산용 원자로를 방사성 동위원소 제조 공장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전쟁용 핵무기를 의학용 원자로로 뒤집는 프로젝트다. 헌 집을 헐어 새집을 짓는 동화 같은 얘기다. 무기를 녹여 쟁기를 만드는 신화의 현실화다.
 
문 대통령이 김정은을 만나 비핵화와 정전선언 사이 ‘접점’을 찾는 협상을 계획대로 진행하되 그와 별도로 ‘영변’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군사용 핵시설을 암 치료 원자로로 교체하는 공동 작업을 제안해 보시라는 얘기다. 이는 마치 남북 간 전면적 경제 교류를 위한 사전 단계로 개성공단을 실험적으로 운영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프로그램은 실패해도 어느 일방의 타격이 크지 않고 성공해서 작은 믿음이라도 생기면 다음 단계로 확대할 수 있어 북·미 모두 좋아할 것이다.
 
무기를 녹여 쟁기를 만드는 구상은 필자의 상상이 아니라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Foreign Policy) 6월 25일자에 실린 논문 내용이다. 세상이 알아주는 핵과학자이자 스탠퍼드대 국제안보협력센터(CISC) 선임연구원인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가 썼다. 헤커 박사는 “영변의 핵시설을 한국원자력연구원에 있는 세계적 수준의 ‘하나로 연구용 원자로’를 설치하거나 신부품 장착(retrofitting) 내부 혁신을 통해 방사성 동위원소 의료 단지로 재탄생시킬 수 있다”고 설파했다. 핵시설의 민간용 전환 과정에 북한의 과학기술자들이 한번 참여하기 시작하면 김정은 정권이 원점으로 되돌리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설명이 붙었다.
 
북한의 비핵화 실천과 미국의 종전선언 간 접점은 ‘영변 핵시설의 평화적 원자로 전환’에 해법이 있다. 평양 방문단이 헤커의 논문에서 영감을 얻어 가면 좋겠다. 이 방안은 시대 정신에도 맞고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실천 프로그램이어서 국내의 반대 여론을 설득하는 데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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