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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에 멍드는 SW 개발자들

#은행용 소프트웨어(SW)를 구축하는 A사 김상호(가명·45) 대표는 얼마 전 황당한 일을 겪었다. 발주사인 B은행의 담당 직원이 사소한 트집을 잡으며 개발 인력을 교체하라고 통보해서다. 김 대표는 “그렇게 3명을 바꾸고 나서 넌지시 자신이 아는 사람을 채용하라더라”며 “나중에 그 둘이 내연관계라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C은행에 파견돼 일하는 개발자 윤지선(가명·33)씨는 발주사 담당자의 지시로 C은행 임원 자녀의 학교 코딩 숙제를 대신 해줬다. 윤씨는 “항의했더니 ‘계약대로 시키는 일이나 하라’고 되레 큰 소리를 쳤다”며 “자칫 눈 밖에 나면 회사가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SW업계에서 프로젝트 발주사의 ‘갑질’이 논란이 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발주사 담당 직원이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까지 일을 시키거나 계약에 없는 업무를 맡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인력 교체나 휴가, 탄력 근무도 SW업체 마음대로 정하지 못한다. 프리랜서 개발자인 김현철(33)씨는 “SW 개발자가 최첨단 기술을 다루는 화려한 직업으로 보이지만, 국내에서는 사실상 막노동판의 일용직 노동자 취급을 당한다”며 “발주사 갑질을 못 견디고 대우가 좋은 해외로 가는 동료 개발자가 많다”고 말했다. 실제 일본 경제산업성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IT 인력 중 일에 대한 충실감과 보람 측면에서 만족하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59.8%로 중국 77.4%, 미국 86.2%에 비해 크게 낮은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SW업계에서는 문제의 원인이 ‘헤드카운팅’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헤드카운팅은 투입되는 인력의 수와 기간을 토대로 가격을 산정하는 계약 방식을 말한다.  
 
가령 어떤 시스템을 만드는 데 연봉 5000만원 수준의 인력 5명을 2년 간 투입해야 한다면 5억원(5000만X5X2)에 SW업체의 마진을 조금 붙여 계약하는 식이다.  
 
국내 SW 도급 계약에선 이 조항을 대부분 포함시킨다. 해외엔 없는 구조다. 이 계약에 따라 SW업체는 정해진 수의 개발자를 투입하고, 발주사는 파견된 개발자를 데리고 시스템을 만든다. SW업체 VTW의 조미리애 대표는 “발주사가 인력의 수와 수준, 출퇴근 시간과 장소까지 간섭한다”며 “형식은 상품제작을 거래하는 도급 계약인데 실제로는 인력파견 계약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런 관행이 인재가 핵심인 SW산업의 경쟁력을 저해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헤드카운팅 구조에서는 투입된 개발자 수를 기준으로 대가를 받기 때문에 불필요한 인력을 투입하는 일이 잦다. 능력을 갖춘 직원을 대우하기보다는 개발자 숫자 채우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조영훈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KOSA) 산업정책실장은 “계약에 따라 일정 경력의 개발자만 채워야 하기 때문에 신입 인력을 키우는 데도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공정거래법·근로기준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본지가 입수한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KOSA) ‘금융 분야 SW사업의 인력 관리 체계 개선 연구’ 보고서는 ‘SW업계의 인력 관리 관행’이 ‘거래상 지위 남용’과 ‘불법파견 혹은 위장도급’ 등에 해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도 이런 문제를 파악하고 있다. 지난 3월 행정안전부는 정부가 발주하는 SW사업에서 헤드카운팅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국내 SW산업에서 공공 부문 비중은 22%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근본적인 문제 개선을 위해서는 헤드카운팅 금지가 민간으로 확산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도승 목포대 법학과 교수는 “특히 비중이 가장 큰 금융권(25%)부터 관행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더불어민주당 고용진 의원은 “금융위원회나 금융감독원이 나서 SW 산업에서의 금융사 갑질을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함승민 기자 s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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